제21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김선태(요한 사도) 주교가 담화를 발표했다. 김 주교의 담화는 단지 정치적인 입장 표명이 아니라, 우리 신앙인의 양심을 일깨우는 호소였다. 이번 선거는 우리가 믿는 복음의 가치를 이 사회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대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언제나 ‘가장 작은 이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의 길을 따르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대통령이 어떤 경제 정책을 펼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기준을 가져야 한다. 국민을 섬기고, 갈라진 공동체를 치유하며, 평화를 일구고, 창조세계를 보전하려는 의지가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번 담화에서 김 주교가 제시한 대통령의 네 가지 덕목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매우 귀중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김 주교는 “우리의 선택이 대한민국의 앞날을 좌우한다”면서 “우리 모두가 후보들의 정책을 꼼꼼히 살피고 식별함으로써, ‘공동선 실현’에 헌신할 수 있는 후보가 뽑힐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우리는 어떤 후보가 진정으로 공동선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약자와 창조세계를 위한 정책을 펼 의지가 있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가톨릭신자로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더 가까이 오게 하는 정직한 일꾼을 뽑기 위해 복음의 정신에 따라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선택 앞에 서 있는 지금,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일구는 지도자가 탄생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실천하자.
새 교황 레오 14세의 선출에 즈음해 신학자들에게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를 물었다. 조사 결과, 응답한 신학자의 절반이 새 교황의 가장 중요한 사목적 과제로 ‘시노달리타스 구현과 시노드 정신에 따른 교회 건설’을 꼽았다. 시노드 교회의 건설은 제삼천년기 교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하느님의 자비를 바탕으로, 하느님 백성 전체가 성령의 인도에 따라 경청과 대화, 식별의 과정을 거쳐 함께 걸어간다는, 시노달리타스의 실현은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참모습이다. 신학자들은 시노드 교회의 건설이 교회의 쇄신을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교회는 경직되고 완고한 자기중심적이고 권위적인 사목, 게으르고 나태한 개인주의적 신앙생활, 그리고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변방으로 나아가 주체할 수 없는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는 교회로 변화돼야 한다. 훼손되고 오염된 공동의 집, 지구를 보존하기 위해 절제된 삶을 살아가며, 폭력과 차별에 고통받는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한 평화의 도구가 돼야 한다. 이러한 모든 사목적 과제는 단지 프란치스코 교황, 그의 개혁 과제를 이어가겠다고 밝힌 레오 14세 교황만의 것이 아니다. 또한 이 과제들의 긴급성과 중요성은 신학자들만이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 전체가 함께 명심하고 실천해야 할 사명이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께 받은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영원한 것은 오직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이다 ” 일찍이 칼 마르크스는 세상을 뒤바꾸어 놓은 그의 저서 「자본론」 맨 앞에 이 구절을 상재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이 구절은 뜻밖에도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한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마르크스를 추종하는 자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그의 뜻만 빼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 이 구절까지-그러니까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까지- 박제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주의이고 공산주의이며 진보라고 우겼다. 보수라면 원래 있는 것들을 박제해도 더 할 말이 없지만, 진보도 이 정도 되면 진보 밀랍 인형이라도 할 말이 없다. 뭐 이상한 일도 아니다. 철학자 최진석은 ‘시대에 따라 도무지 변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가 경험한 것만을 믿는 사람을 꼰대’라고 정의했다. 그는 말한다. 장자를 열심히 읽은 제자가 어느 날 그에게 와서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께서 쓰신 「장자」를 정말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저도 장자처럼 살려고 결심했습니다” 하자, 이 철학자는 그에게 일갈을 가한다. “너는 헛공부를 했구나 장자는 너 자신으로 살라고 한 말인 것을, 기껏 장자를 읽고 장자처럼 산다는 말인가” 하고. “우리가 옛날에 정권에 대항해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던 시대에 감옥 같은 거 법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니었지.” 나는 이런 꼰대의 출현을 나의 동기들에게서 지겹도록 보고 있다. 시대의 정신만 빼고 다 박제해버린 꼰대들 말이다. 한번은 신앙이 돈독하다는 어느 자매가 내게 다가와 “마리아 자매님, 저는 성경을 다섯 번이나 읽은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혼하면 하느님을 거스르는 거라고 했는데 잘 아시죠?” 하고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예, 자매님. 제 수많은 지난 날의 죄 중의 하나이지요. 다만 예수님께서 다시 세우신 새로운 계약, 즉 신약이란 간단히 요약하자면 – 제가 이해하기에 - 자구에 얽매이지 말고 하느님과 너의 이웃을 사랑해라, 아니었던가요?” 아직도 강연에 가면, “작가님은 진보인가요? 보수인가요?” 하고 묻는다. 나는 대체로 진보적인 사람이지만, 요즘은 대체 어디에 그 진보라는 것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백 년이 넘는 시간동안, 우리 역사는 지독한 수구 세력에 의해 모든 새로운 싹이 잘려 나간 아픈 시간을 가지고 있다. 동학부터 시작되었을 그 아픈 역사 때문에, 사실 우리나라에서 진보는 대개 옳았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나는 2018년 소설 「해리」 발간 당시 인터뷰에서, “당분간 우리의 싸움은 가짜 진보 사기꾼들과의 싸움”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 예언 아닌 예언은 불행히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떻게 저 수구 보수를 지지해? 난 진보야”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나는 말한다. 김정은은 보수인가 진보인가? 시진핑은? 프랑스 혁명 후의 로베스피에르는? 루터는 분명 진보였다. 유명한 종교개혁 독재자 칼뱅도 말이다. 이 나라의 역사가 거대한 모퉁이를 돌고 있는 것을 나는 느낀다. 엄청난 파시즘의 악취도 감지되는 요즘, 나는 더 이상의 애타는 기도를 멈추고 오로지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한나 아렌트가 그랬다. “파시즘은 광기의 결과가 아니라, 생각을 멈춘 자들의 고립감과 외로움, 소외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 이 산골에서 스스로 고립되어 성무일도를 읽으며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뇌를 선동꾼들에게 의탁하지 않겠다' 라고. 그리하여 절망하지 않을 용기를 청해본다. 아아, 주님께서 우리의 희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리라.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지난 5월 10일부터 11일까지 서울 혜화동 대학로와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등에서 개최된 유스 페스티벌 ‘희희희’에 다녀왔다. 많은 본당의 주일학교 학생들과 청년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혜화동을 찾았다. 볼거리, 체험거리가 가득했다. 특히 체험 부스들이 눈길을 끌었다. ‘희희희’는 청년 세대가 관심을 가질만 한 기후위기, 인신매매 문제, 평화, 세대 간 갈등 등의 이슈들을 설문조사와 이벤트, 전시회 등으로 부담 없이 접하도록 했다. 더불어 초등학생들도 즐기도록 두더지게임, 토종 씨앗 심기, OX퀴즈 등 직관적이면서 간단한 즐길거리들이 보였다. 또한 한양여대 유기견 봉사 동아리 ‘도그어스플래닛’ 부스, 아프리카 짐바브웨 청년들에게 후원하기 위해 공예품을 파는 ‘무카나’ 부스 등 색다른 주제들도 있었다. 이번 축제는 ‘미리보는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라고 한다. 신자들은 마음껏 즐기고 비신자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가톨릭과 청년대회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 행사에 반영된 이유다. 일반 시민들과 더 가까운 곳에서 교회를 마음껏 홍보했다. 홍보와 더불어 놓치지 말아야 할, 복음과 신앙을 주제로 한 콘텐츠도 충분했다고 본다. 2023년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은 국내에서 열리는 대규모 국제행사에 대한 우려를 키웠다. 사실 대회의 규모면에서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도 그 우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회의 원활한 진행을 위한 관련 특별법 발의를 두고 타 종교계가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도 극복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하지만 교회는 차근차근 인간의 손으로 할 수 있는 부분들을 묵묵히 채우고 준비해나가고 있다. 그 모습이 ‘희희희’에서 엿보여 기대를 품게 된다.
오월의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아이와 같이 달린다. 얼굴과 팔뚝에 바람이 닿는다. 참 좋다. ‘행복’이라는 관념에 몸이 있다면 그건 ‘바람’이 아닐까? 언제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내 곁에 있고, 떠난 뒤에야 항상 또렷해지는 바람.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바람이 팔에 닿는 속도, 바람이 닿는 그 온도가 바로 행복의 느낌이라고. 늦은 오후 아이를 앞세우고 천천히 달려가며 아이를 바라본다. 작은 몸에도 넘어지지 않고 참 잘도 달린다. 경사진 언덕을 오를 때면 살짝 일어서서 페달에 번갈아 체중을 실어 밟으며 달려간다. 자전거에 서툰 나는 그런 아이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사실 나는 마흔에 자전거를 처음 배웠다. 그래서 여전히 자전거는 좋으면서도 불안하고 두렵다. 행복처럼. 최초부터 나에게 자전거는 핸들을 잡고 페달을 구르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잡고 등에 기대어 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자전거였고 자전거는 아버지였다. 학교에 갈 때면 나는 아버지의 자전거를 탔다. 아버지의 등 뒤에 앉아 허리를 잡고 등에 기대면 아버지는 힘차게 페달을 굴렀다. 그렇게 둘이 함께 바람 속을 달려갈 때 나는 행복했다. 교차로를 지나며 아버지가 속도를 높일 때면 체구가 작은 나는 아버지의 등 뒤에 더욱 바짝 달라 붙었다. 아버지의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내 왼쪽 귀에 들려왔다. ‘쿵쾅쿵쾅’ 내 심장도 그렇게 아버지의 심장 소리에 박자를 맞췄다. 숨이 턱까지 차 올랐을 언덕을 몇 번 넘어 아버지는 나를 학교에 내려주고 직장으로 달려가셨다. 나는 언제나 교문 앞에 서서 미소를 머금고 아버지를 오래 바라 보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 아침이었다. 그냥 자전거에 앉아 비를 맞기엔 날씨가 조금 추웠다. 아버지는 가까운 버스 정거장에 멈춰 서서 학교로 가는 버스에 나를 태웠다. 비를 맞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는 잠시, 내 손에 버스비가 없었다. 안내양 언니에게 무어라 해야 할까 작은 심장이 쿵쾅쿵쾅 소리를 냈다. 학교 앞 정거장에 가까워지자, 너무 두려워 현기증이 났다. 드디어 버스는 정거장에 멈췄고 버스 문이 열리자 아버지가 보였다. 흠뻑 젖은 아버지는 벌써 정거장에 도착해 있었다. 아버지를 보니 와락 눈물을 터졌다. 아버지는 안내양 언니에게 버스비를 건네 주었다. 그리고 내게 달려오셨다. 그 아끼는 자전거가 쓰러지는데도 상관치 않고 내 앞에 앉아 나를 꼭 안아 주셨다. 비에 맞지 않게 하려고 버스에 태우는 것만 생각했노라고, 너를 태워 보내고야 버스비를 주지 않았단 생각에 지름길로 달려 버스보다 먼저 왔노라고 아버지는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등 뒤가 아닌 가슴에 안겨 한참 울었다. 안도와 행복의 그 순간. 그때 아버지의 심장 소리가 쿵쾅쿵쾅 들렸다. 아이와 함께 호수까지 달려간다. 나보다 힘이 좋은 아이는 엄마와 속도를 맞추느라 천천히 달려준다. 내가 호수를 한바퀴 도는 동안 아이는 두바퀴를 돈다. 그러다가 제 속도에 맞게 쌩쌩 달려 금세 호수를 한바퀴 더 돌고 내 앞으로 온다. 행복과 충만함이 가득 찬 얼굴. 나는 아이를 부른다. 벤치에 앉은 내 앞으로 아이가 다가오면 나는 아이의 가슴에 귀를 대어 본다. 쿵쾅쿵쾅 심장이 크게 뛴다. 아이가 내게 묻는다. 어떻게 들리느냐고. 그러면 나는 내 가슴에 아이의 귀를 대어준다. 지금 네 심장소리는 꼭 이렇다고. 아이가 내 가슴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아이를 안고 나는 오래전 떠난 아버지의 심장 소리를 바람 속에서 듣는다.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14세기 이탈리아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1347~1380)는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끊임없이 외쳤지만, 항상 개인은 먼저 내면을 성찰해야 한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위기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자기 비움과 내면의 정화를 통해 교회와 사회를 바로 세우려 했던 이의 고백은 여전히 계속되고, 성녀의 내적 자세는 여전히 우리 마음에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지난 몇 년 그리고 그 끝자락에서 우리는 어둠의 문턱을 함께 넘어왔다. 정의가 무너지고 공동체의 숨결마저 메말라가던 때, 많은 이가 침묵과 인내로 그 시간을 견뎌 이제 다시 역사의 한 장을 이룰 자리에 다다랐다.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좌절 대신 성찰을 택했고, 분노보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이를 ‘문턱’을 뜻하는 라틴어 ‘līmen’에서 유래된 ‘리미널리티(liminality)’로 정리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글라스고 출신의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 1920~1983)는 이를 “통과의례에서 나타나는 중간단계, 곧 이전의 질서는 무너졌지만, 새로운 질서로는 아직 진입하지 못한 과도기적 상태”라고 정의한다. 이 전환기에는 사회적 정체성과 질서가 잠시 정지되고, 사람들은 혼돈 속에서 침묵을 넘어 변화의 시간을 통과하게 된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리미널리티 상태에서 무엇이 정의이고 진실인지에 대한 뼈저린 통찰을 통해 여기에 도달했다. 익명성 안에서 진실을 외치기 위해 영하의 추위를 견딘 용기, 광풍같이 몰아치는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은 양심, 사사로운 이익보다 국가를 위해 정의를 택했던 수많은 이가 바로 함께 문지방을 넘어선 이들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묻는다. 무너진 나라 살림, 종식되지 않은 내란, 임계점을 넘어선 기후변화라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 나라를 이끌 대통령은 누구여야 하는가? 그는 단순한 권력의 수혜자가 아니라, 이 통과의례를 함께 견뎌온 국가 공동체의 동반자여야 한다. 권력이 아니라 책임으로, 지배가 아니라 섬김으로 나아갈 줄 아는 이여야만 한다. 신앙의 지침, 삶의 지침을 몸소 보여주시고 선종하신 교종 프란치스코(1936~2025)는 “더 나은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하며, 사랑으로 사람을 중심에 두는 ‘정치적 애덕’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180항 참조) 이 말은 대통령이 단지 행정의 수반이 아닌 국민의 상처를 보듬고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해야 할 사명의 자리, 곧 공동체 전체의 존엄과 일치를 위해 스스로를 내어놓는 사랑의 자리임을 일깨운다. 그 자리는 정치적 셈법을 따지는 계산대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의 눈물과 목소리를 듣고 응답해야 하는 윤리적 감수성을 지닌 책임의 중심지이며,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동반자로서의 사명 또한 품어야 하는 자리다. 회복의 정치는 분열이 아닌 연대의 언어를 사용하고, 정의로운 기억을 바탕으로 용서와 화해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대통령은 ‘정의의 검’이 아니라 ‘정의의 저울’을 들 줄 알아야 한다. 국민은 더 많은 공약을 원하지 않는다. 더 깊은 책임, 더 단단한 도덕성, 더 낮은 자세를 원한다. 먼저 낮아지고 먼저 회심할 줄 아는 지도자만이 공동체를 이끌 자격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시대의 변화를 지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인간다움을 본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필리 2,6-7)신 분이시다. 새로운 대통령 역시 통치의 자리가 아닌 섬김의 자세로 있기를 바란다. 기다린다, 우리는. 어둠의 문턱을 넘어선 이들이 더 이상 뒷걸음치지 않도록, 그 곁을 함께 걸을 대통령이 이 나라를 온전히 껴안는 사람으로 나타나기를.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연록의 싱그러움이 눈부셔 오는 오월 이 아름다운 계절, 성모 성월 꽃향기 은은히 젖어드는 오늘 이 저녁 성모 어머니, 저희 자녀들이 당신의 무릎에 이렇듯 모여 장미꽃다발을 엮어 당신 발아래 드리옵니다. 어머니, 당신은 맑고 그윽한 눈빛으로 한없이 자애로운 마음으로 지금 당신 자녀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당신의 모범을 따라 자녀답게 살아가기를 바라며 저희 마음을 낱낱이 꿰뚫어 보시는 어머니! 엇갈린 길로 부질없이 떠나갈 때도 아픈 마음 다독이시며 한없이 기다려 주시는 어머니.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쓰러질 때 어서 일어나라고 더운 손 잡아주시며 일으켜주시는 어머니. 그 손 미처 잡지 못하고 지쳐 넘어질 때 그래서, 한없이 울고 싶을 때 어서 오너라 얘야, 내가 여기 있노라 넓은 치마폭으로 품어주소서 아니. 이미 당신 치마폭이 저희를 감싸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소서 천상어머니! 이 시간 저희들의 모든 소망들을 장미로 피워내는 믿음을 청하며 아름다운 기도의 꽃을 바칩니다 다정한 어머니의 이름 부르며 저희 모두 하나 되는 아름다운 이 저녁 우리 모두 당신께 바치는 한송이, 한송이 꽃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글 _ 윤판자 효주 아녜스(대구대교구 대곡본당)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전 세계가 사랑하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였다. 지금 새 교황의 탄생을 기다리며, 최근에 상영된 영화 <콘클라베>가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시작된 콘클라베 3일간의 과정을 다루었다. 짧은 시간의 이야기이지만 여기에 우리 교회의 모습이 잘 담겨있다.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거룩함이 드러나고 콘클라베의 주체가 바로 성령임이 밝혀진다. 첫째, 교회의 고뇌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회의를 주재하는 수석 추기경 ‘토마스 로렌스’가 주인공 역할을 하며 회의를 이끌고 가는데, 그 이름이 의미하듯 의심하고 질문하며 진리의 길을 찾아간다. 그는 첫날 강론에서 “확신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죄”라고 하며 추기경들에게 경고하는데, 교회는 결코 자기도취나 편안함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모습이다. 최다 득표를 이어가고 있는 아프리카 추기경의 성추문이 드러나고, 교황직 선출을 위해 미리 추기경들을 매수하는 성직 매매의 추악함과 자신의 탐욕을 위해 상대의 과거사를 들추어내는 불의와 부정직한 인간성이 드러난다. 셋째, 교회의 거룩함이다. 교회는 인간이 이끌어가지 않고,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처럼 거룩한 성령께서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심을 말한다. 회의 전날 갑자기 명단에도 없는 추기경이 등장한다. 이분이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며 마지막에 새 교황으로 선출된다. 마지막으로 교회 여성의 역할을 볼 수 있다. 콘클라베 회의 동안 수녀들은 회의를 위해 요리를 하고 세탁하는 가정부의 역할을 하지만, 성추문과 성직 매매의 진실을 밝힌다. 여성이 교회의 리더 역할에서 배제되지만, 진실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있다. 마지막에 놀랄만한 반전이 있는데, 이 신선한 충격이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을 스포일러하지 않기 위해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이것을 통해 내다본 전망만 밝힌다. 가톨릭교회의 여성 사제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 그 필요성과 요구가 빗발치지만, 지금까지 아직 유보된 상태이다. 그 이유로 제시되는 것은 이는 교회 전통에 어긋나며, 예수님이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사제)의 인격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참조: 「직무 사제직에 대한 여성 수용의 문제에 대한 선언」(Inter Insigniores, 1976)) 그렇다면 여성의 인격 안에는 예수님께서 현존하시지 않을까?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바로 그 의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존경한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 사회의 소외된 자인 성소수자들까지도 껴안았다. 또 역사상 첫 교황청 여성 장관까지 임명한 진보주의 성향을 보였지만, 여성 사제직에 대해서는 문을 열어놓지 않았다. 지금 새로운 ‘교황 선출을 위한 기도’를 바치면서, 이번 교황은 누가 되더라도 그 개혁의 문을 활짝 열어놓을 수 있는 분이기를 열망한다. 또 그렇게 되기를 믿는다. 콘클라베의 주체는 그때마다 놀라운 반전을 일으키시는 성령이시니까. 글 _ 마리 파울리타 수녀(노틀담 수녀회)
새 교황 레오 14세의 탄생을 하느님 백성 모두와 함께 기뻐하며, 착한 목자를 교황으로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5월 8일,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소속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 제267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하느님께서 콘클라베에 참석한 모든 추기경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의 마음에 성령을 불어넣어 지혜로운 선택으로 이끄셨음을 믿는다. 너무나 사랑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던 2013년, 가톨릭교회는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서구 교회를 송두리째 뒤흔든 성직자 아동 성추행 문제와 교황청 재정을 둘러싼 여러 비리는 교회에 대한 신뢰를 바닥까지 떨어뜨렸다. 종교에 대한 무관심, 세속주의와 상대주의, 완고하고 경직된 교회 사목과 행정 등은 교회를 위기에 빠뜨렸다. 그런 와중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왔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얼굴로서의 교회, 변방으로 나아가고 가난한 이들을 품에 안는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 복음의 기쁨이 흘러넘치는 선교적 교회의 모습을 제시했다. 교회는 새로운 희망에 부풀기 시작했고, 저항과 반발 속에서도 성령 안에서의 대화와 경청, 식별을 통해 이뤄지는 시노드 교회의 전망을 보여주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이후, 교회는 중대한 역사의 갈림길에 섰다. 미래 교회의 새로운 전망을 보여준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노선을 이어갈 것인지, 아니면 시노달리타스로 불리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에서 한 발 물러설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미국 출신의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소속 수사이자, 페루에서 가난한 이들 속에서 사목 활동을 해온 프레보스트 추기경을 새 교황으로 선출함으로써 교회의 방향성을 결정했다. 추기경들과 성령께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을 이어가고 세상에 평화를 실현하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투명한 교회의 지도자로서 레오 14세 교황을 선택했다. 프레보스트 추기경은 자신의 교황명을 레오 14세로 정했다. 이는 최초의 사회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통해 산업혁명 시기의 노동자들의 권리와 사회 정의 문제에 응답하고자 했던 레오 13세 교황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인공지능(AI)의 발전이 또 다른 산업혁명으로 받아들여지는 현대 세계 속에서, 레오 14세 교황은 교회의 사회교리를 오늘날의 시대와 사회에 적용해 사회 발전과 정의 문제에 응답하려는 것이다. 레오 14세 교황은 무엇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을 ‘복음적 원칙’으로 여기며, “이 귀중한 유산을 받아들여 믿음에서 태어나는 희망으로 이 여정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천명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재위 기간 내내 교회 개혁 시도에 대한 저항과 반발은 끊임없이 있었고, 때로는 매우 노골적이고 공식적으로까지 이 개혁이 교회의 가르침을 훼손하고 하느님 백성을 혼란에 빠뜨린다고 비난했다. 레오 14세 교황은 이러한 모든 비판을 거슬러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레오 14세 교황은 선출 직후 첫 축복 메시지에서 “두려움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한 남녀 신자들이 되어 복음을 선포하고 선교하는 하나의 교회로 함께 걷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어 ‘선교하는 교회’, ‘다리를 놓고 대화를 여는 교회’, ‘늘 환영하며 품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3년 동안 이어진 세계주교시노드를 통해 우리는 시노달리타스에 바탕을 둔 선교하는 교회의 전망을 모색했다.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작한 이 위대한 개혁, 시노드 교회의 건설을 레오 14세 교황과 함께 완성해나가야 할 것이다.
까리따스 이주민 초월센터는 5월 11일 마을 어르신을 초대해 어버이날 행사를 열었다. 그동안 자신들에게 경로당 등을 내어준 어르신들의 따뜻함에 대한 보답이었다. 물론 처음 외국인들이 동네에 늘어날 때는 낯설고 생소해 서로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이 어색함을 해소하고자 센터는 지난해 처음 어버이날 행사를 기획했고, 성공리에 친교의 시간을 보냈다. 화합을 강조한 백 번의 강연보다, 한자리에 앉아 밥 한 끼 같이 먹고, 공연 보며 웃고 즐긴 ‘부대낌’ 한 번이 벽을 허물게 했다. 나와 다른 줄 알았던 존재가 나와 똑같은 걸 먹고 마시고, 하나의 큰 공감대 안에서 울고 웃는 한 인류임을 체감한 것이다. 이러한 동질감은 미사 중에도 경험할 수 있다. 한 분이신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눠 먹고 마시고, 서로 마주 보며 평화의 인사를 하며, 함께 손잡고 성가를 부를 때 우리는 성령 안의 한 형제임을 깨닫는다. ‘남’, 이주민에 대한 이질감의 해소 방법은 바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선에서의 이 ‘부대낌’에 있지 않을까. 유럽 출신 이주민의 자손인 레오 14세 교황은 페루에서 사목하는 동안 페루에 온 베네수엘라 이주민들에게 관심이 컸다고 한다. 또한 추기경 시절 자신의 SNS에 반 이민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게시글을 여러 번 공유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황의 이주민 포용 뜻을 우리도 새기며 마음을 여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신명 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