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부활 제6주일, 청소년 주일

오늘 복음(요한 14,23)에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 사랑을 율법으로 규정한 신명기 6장 5절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 아래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받은 율법 가운데 으뜸입니다(마태 22,36-38 참조). 그만큼 하느님 사랑은 우리에게 익숙한 율법이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서 지키고 있는지 가늠하기는 어려운 규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레위기 19장 17절에는 이와 반대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미운 감정을 다스리려 노력하듯 사랑도 함양해갈 수 있다는 뜻이겠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과연 어떻게 정의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유다인들은 구약의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 애씁니다. 안식일이 되면, 무거운 짐을 들지 말라는 규정(예레 17,22)을 지키려고 비가 와도 우산도 쓰지 않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기원전 6세기에 시나이산 계약을 어긴 죗값으로 망국의 비극을 겪었기에, 그런 재앙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율법을 더 엄격하게 지키려 노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보면 하느님 사랑이 실천해야 하는 행동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영적 의미를 높게 보는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이런 유다인들의 행동이 몸에 밴 습관처럼 비치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을 율법으로 제정한 고대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아무래도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인 의미가 원 뜻에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해석에는 고대 근동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이 도움을 줍니다. ▶ 파라오에 대한 사랑: 옛 이집트에 자리했던 ‘아마르나’라는 성읍의 유적부터 보겠습니다. 아마르나는 한때 이집트를 뒤흔든 종교 혁명의 중심지로서, 고대 이집트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신을 섬긴 파라오의 수도였습니다. 옛 이집트의 종교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다양한 동물 형상을 한 신들을 섬겼지만, 기원전 14세기 파라오 아케나톤은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며 수도를 아마르나로 옮겼습니다. 이런 행보가 기존 종교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기에 아마르나 시대는 짧을 수밖에 없었지만, 아마르나는 이후 성경 학계에서 중요한 장소가 됩니다. 왜냐하면 옛 가나안과 이집트를 오간 서신이 이곳에서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서신은 ‘아마르나 편지’라 일컬어지는데, 옛 가나안과 이집트의 상황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이에 따르면 가나안은 이집트의 지배를 받는 소규모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예루살렘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이 서간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파라오에 대한 사랑입니다. 가나안의 봉신 국가들은 파라오를 ‘사랑’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우리 기준으로는 파라오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네들에게 사랑은 정치적 의미로서 ‘충성’을 뜻하였습니다. ▶ 아시리아 주군에 대한 사랑: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의 임금 에사르 하똔과 관련된 기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에사르 하똔이 봉신 국가들에 황태자인 아슈르바니팔을 ‘사랑’하라고 명하는데요, 이 역시 파라오에 대한 사랑과 맥을 같이합니다. 말하자면 고대 근동인들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차원을 넘어선, 계약의 맥락에서도 쓰인 일종의 관용어였던 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성경에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피력하거나 요구하는 구절이 신명기 6장 5절 외에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에 대해 위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면, 이는 ‘누구든 예수님께 충성하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요한 21장 15절에서 19절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래아 바닷가에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 베드로에게 수위권(首位權)을 재확인하신 상황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어보신 의도가 좀 더 구체적으로 가늠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에 대한 베드로의 마음이 애틋한지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신의를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하신 매우 실제적인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5주일

오늘 복음은 “유다가 나간 뒤에”라는, 때를 알리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 앞의 장면은 성목요일 저녁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뒤,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시는 긴장감이 도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적셔 유다에게 주시어 제자들이 나중에 깨달을 수 있도록 배신자를 미리 지목하셨고, 심지어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라고 말씀하시어 적어도 유다에게는 당신이 알고 계심을 명확히 알리십니다. 유다는 이미 마음에 사탄을 품었기에 그 말씀에도 회개하지 않고 배반의 길로 나갑니다. 그의 마음속의 어둠을 요한 복음사가는 “때는 밤이었다”라고 표현합니다.(요한 13,21-30 참조) 이 밤은 배신의 밤이자 예수님께는 수난과 죽음이 시작되는 고통의 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요한 13,31)라고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3,32)라고 덧붙이십니다. 즉, 사람의 아들은 두 번 영광스럽게 되십니다. ‘이제 곧’, 즉 머지않은 미래에 영광스럽게 되신다는 것은 당신의 부활을 가리키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유다가 나간, 또는 유다를 보내신 ‘이제’라는 시점에 이미 이루어진, 또는 이미 시작된 영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선택하신 당신의 수난과 죽음입니다. 고통의 신비와 영광의 신비를 나누어 생각한다면 이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들어 올려짐’으로 여러 번 표현되는데(요한 3,14. 8,28. 12,32), 이는 죽음의 형벌이기도 하지만 영광스러운 표징이기도 합니다. 구리 뱀을 본 사람이 모두 살아났듯이 그분을 믿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죽음을 택하셨지만, 그것은 그분이 아드님이시며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보여주는 징표가 됩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목숨을 내어주는 참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기에, 또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 영광에 초대하십니다. 그분의 뒤를 따르기 위한 새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면서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사람을 사랑하여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사랑하셨듯이 목숨을 바치는 참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면서 예수님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참조)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희생을 통해서 당신이 아버지 안에 머물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머무시는 일치를 완성하셨듯이, 제자들이 당신과 같이 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요한 14,3-11 참조). 그리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 당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당신 안에 머무르는 것이 모두 같은 것이고, 그렇게 하면 그들이 당신의 친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4,20-21. 15,1-17 참조). 이것이 제자들의 영광이요 그들의 구원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잘 알아들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기다렸지만 계속되는 박해와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교회가 겪는 고난이 곧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오늘날 어떤 이는 교회가 기다리고 있는 세상 구원이 이천 년이 지난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 정도면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이천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이가 주님의 사랑을 살고 전했으며, 이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 구원은 늘 이 세상에 넘쳐흘렀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고, 그분이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묵시 21, 3-5 참조)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2면

[말씀묵상]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하느님을 닮았기에 하느님의 선한 마음, 깊은 지혜, 넓은 아량을 느끼며 감사드릴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꽃보다 더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로 사랑하시기에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과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각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각자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이 다르기에 서로에게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한마음 한 몸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세월의 흐름 가운데 지난날을 돌아볼 때가 있습니다. 자기 삶의 어느 한 순간을 돌아보며 그때 이런 결정을 했더라면, 이렇게 했더라면, 이런 사람을 만났더라면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떠올리게 되는 시 한 편이 있습니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두 갈래 길 중에서 어느 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두 길을 한 번에 다 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함과 미련이 올라옵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이 길을 충실히 걸어가며 감사와 행복을 더욱 느낄 수 있어야겠다는 마음을 담은 시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크고 작은, 중요하고 사소한 수많은 길들 중에 어떤 길을 선택하고 응답하였고, 또 그 길을 충실히 걸어왔습니다. 이런 인생 여정을 살아온 한 분 한 분에게 커다란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서 지금까지보다 더 아름다운 만남과 사건들이 자리하기를 기도합니다. 매일매일 가장 의미 있는 삶을 가꾸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일까요? 그 삶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아닐지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느님의 자녀, 가톨릭신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가 신앙인으로, 가톨릭신자로 부르심을 받아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도록 초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가운데서도 사제직과 수도생활에로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을 생각하는 ‘성소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가장 답하기 어려운 물음들 중 하나는 ‘왜 사제가 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르심을 느꼈고, 또 ‘예’라고 응답할 수 있었는지의 물음입니다. 어느 호젓한 밤 앞날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가운데, 인생살이의 제한된 시간 안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를 고민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고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한 가장 좋은 삶은 ‘사제의 길’이라고 마음속에서 울려왔습니다. 그래서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하고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때의 순수한 마음이 퇴색된 듯 느껴질 땐 부끄러움과 아픔을 느끼며, 조금이나마 더 잘 살아가려고 애쓴다고 여겨질 땐 하느님께 감사와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부르심과 응답의 그 순간을 되새기며 부족하지만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여러 신부님들, 수녀님들, 평신도분들을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이렇게 돌아보다 보면 문득 ‘나는 누군가에게 선물의 존재가 되고 있는가?’하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부르심과 응답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준비하며,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계속 충실하라’고 권고하십니다.(사도 13,43 참조)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8)고 약속하십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사람들’(묵시 7,9 참조)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여야 합니다.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성소의 길을 걷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한 기도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3주일, 생명 주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기 전 티베리아스라고도 불리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만나시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이야기는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제자가 물고기를 잡기에 가장 좋은 때인 밤에 배를 몰고 나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밤새 허탕을 치고 맙니다. 어부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이상합니다.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이윽고 아침이 될 무렵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마치 짙은 어둠이 삼켜버린 것만 같았던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느낌입니다. 부활과 참 잘 어울리는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옛 교우들은 부활 새벽에 산에 올라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하고, 태양이 뜨고 있음을 알리는 수탉은 부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호숫가에 서신 예수님께서 약 100미터쯤 떨어진 배 위의 제자들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는 데 사용하신 ‘얘들아’(παιδία)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합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요한 21,5) 사실 이 단어로 제자들을 부르는 것은 어색합니다. 7세 미만의 어린아이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실까요?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당신을 배신하고 버린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이 괘씸한 죄인이 아니라 마냥 무섭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서 도망쳐 버리고만 가련한 어린아이들로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오른편은 상서로운 방향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153마리나 되는 고기가 잡혔습니다. 오리게네스 교부에 따르면 당시 알려져 있던 물고기 종류가 153가지였다고 하니, 153마리의 물고기는 온 세상 사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첫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루카 5,1-11 참조)과 흡사한 이 장면은 예수께서 비록 제자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떠났어도 그들을 다시 불러 모든 민족을 낚는 어부로 거듭나게 하심을 보여줍니다. 제자는 스승을 버렸으나, 스승은 제자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내 예수님을 알아본 베드로는 옷을 입고 그분께로 헤엄쳐 갑니다.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죄인의 반응입니다.(창세 3,10 참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죄책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의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사명을 부여해 세상으로 파견하기 전 손수 한 끼 식사를 챙겨 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과 생선을 나누어 먹이시는 모습은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사를 세우신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미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신 죽음이니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성체성사 안에서 늘 일치하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질문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는 슬퍼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슬픔은 곧잘 깨달음의 매개체가 되곤 합니다. 베드로도 슬픔을 통하여 세 번 배반한 자신에게 세 번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심으로써 마음을 치유해 주시는 주님의 자비를 깨닫게 됩니다. 특이한 점은, 예수님이 두 번은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질문하시고 마지막 질문에는 ‘필레오’(φιλέω)라는 동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세 번 모두 ‘필레오’라는 동사로 대답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 단어들을 모두 사랑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두 동사가 의미하는 바는 다릅니다. 필레오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 주로 사용되고, 아가파오는 신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아가파오로 물으시는 첫 두 개의 질문에 필레오로 대답한 것은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이 아직 미숙함을 고백하며 그것을 채워 주시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과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필레오로 질문하신 다음 당신 양들을 돌보라 명하십니다. 형제에게 향하는 필레오에 주님께로 향하는 아가파오의 비밀이 숨어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형제를 사랑하면서 하느님 사랑을 배우라는 가르침으로 이해됩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예루살렘의 구도시(old city)에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하는 순례지가 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의 법정에서 시작해 골고타 언덕까지 이어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으신 ‘고통의 길’입니다. 지금은 옛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끄러운 시장이 됐습니다. 비아 돌로로사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며 골고타까지 가다 보면, 순례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상인과 행인들의 눈길이 꽂혀옵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형틀 나무를 지고 올라가는 나자렛 사람 예수의 행렬을 많은 이들이 구경하였듯이 말입니다. 동물원 원숭이를 보듯 구경하며, 메시아가 저럴 수는 없다고 혀를 찼을 터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골고타가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죄인들의 형 집행이 이루어졌고, ‘해골터’라는 지명 뜻처럼 무덤도 있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당시 형벌 가운데 가장 잔인한 종류로서, 베드로도 이 형벌이 두려워 예수님과 한패가 아니라며 세 차례 부인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은 고통에 시달리다 서서히 죽었다고 하니, 예수님이 당일 운명하신 것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마르 15,44)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이 그런 십자가 위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 점이 가장 놀라운 일이지만 말입니다. 마르코복음 15장 39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이방인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한 것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지는(마르 15,38) 광경을 그가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전은 예부터 주님의 현존이 상징적으로 자리하신 곳으로서 에덴동산을 재현하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성전이 에덴동산을 재현하는 곳임을 암시해 주는 실마리는 성경에 여럿 존재합니다. 첫째, 에덴동산에서 원조들이 하느님을 자유롭게 뵐 수 있었듯이, 성전도 하느님께서 인간을 공식적으로 만나 주시던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두 곳 모두 죄 없는 상태, 정결한 상태여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원조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건 죄를 지어 합당한 정결함을 잃어서였고, 옛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정결 예식을 치러야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벳자타 못과 9장의 실로암 못이 예수님 시대 사용한 대표적인 정결 예식터였습니다. 셋째, 커룹의 존재도 공통됩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따르면 에덴동산의 입구에서는 커룹이 불 칼과 함께 지켰고, 성전에는 지성소의 계약 궤에 커룹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원조들이 에덴동산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커룹들이 지켰듯이, 지성소 또한 커룹이 자리해 있음으로써 일반 백성의 접근을 상징적으로 제한하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두 곳의 공통점은 ‘기혼’이라는 지명에서 드러납니다. 기혼은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네 강 가운데 하나이자(창세 2,13) 예루살렘 성에 자리한 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옛 예루살렘의 중심에는 성전이 봉헌돼 있었고, 기혼 샘은 성전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형태였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기혼강이 흘러나왔다는 에덴동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컨대, 옛 이스라엘 백성은 부분적으로나마 성전에서 에덴동산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현존을 상징한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사제만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레위 16,2.29.33) 그러나 신약 시대에 교회의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단 한 번의 희생 제사로 그 금지된 정원, 곧 에덴동산을 상징한 지성소의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비가 이방인 백인대장의 고백 안에 담겨 있는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확인하고 그분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서야 믿지만, 이방인 백인대장은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지는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신비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다만 에덴동산을 상징적으로 재현해 준 성전은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무너졌고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덴동산을 상징한 성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신께서 성전이 되셨고(요한 2,20-21 참조), 또한 우리 모두가 그 이후 성령을 모신 성전이 됐기 때문입니다.(1코린 3,16; 2코린 6,16 참조).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8면

[말씀묵상]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예수님 수난기에 등장하는 제각각 다른 모습의 사람들 중 나는 누구 모습인지 묵상하며 의미있는 성주간 보내야 각자의 머리에 재를 얹으며 시작한 사순 시기가 마무리되어 가는 오늘, 성주간의 첫째 날에 우리는 성지(聖枝)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합니다. 또한 ‘주님의 수난기’를 들으며 성금요일에 이루어질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묵상하며 준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수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최후 만찬 때에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를 두고 말다툼을 벌이고, 잠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 채 예수님 홀로 수난의 길을 걷게 한 ‘제자들’과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도 갈 수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다고 외쳤지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한 ‘베드로’를 떠올리게 됩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성전 경비대장들’, 제자의 칼에 잘린 오른쪽 귀를 치유 받은 ‘대사제의 종’,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추궁하는 ‘대사제의 하녀’도 떠오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 급급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최고 의회 의원들’과 예루살렘 입성 때 환호했던 사실을 잊어 버리고 바라빠를 풀어달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루카 23,21)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백성들’을 바라봅니다. 또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들려오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외면하고, 군중의 폭동과 지위 상실에 대한 위협에 굴복하여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리고 바라빠를 풀어 주는 ‘빌라도’와 예수님을 하나의 조롱거리 장난감 정도로만 여기는 ‘헤로데’를 봅니다. 예수님을 대신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해골 언덕으로 오르는 키레네 사람 ‘시몬’과 십자가의 길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을 만납니다. 그저 죽음의 시간만을 기다리다가 이유도 모른 채 석방된 ‘바라빠’,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 그리고 자신이나 구원해 보라며 빈정거리고 조롱한 ‘지도자들과 군사들’도 만납니다. 당신은 메시아시니 우리를 구원해 보라고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수 한 사람’과 예수님은 무죄임을 고백하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실 때 기억해 주십사고 청하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다른 죄수 한 사람’의 모습도 봅니다. 예수님께서 의로운 분이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아보는 ‘백인대장’, 멀찍이 서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무덤에 모심을 지켜보고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는 ‘갈릴래아에서부터 함께 온 여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무덤에 모시는 아리마태아 출신 최고 의회 의원 ‘요셉’의 믿음을 봅니다. 이 모든 사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의 길에 자리한 이 사람들은 자신과 자기 이익을 기준으로 각자 저울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과 새 계약의 피를 나누어 먹고 마시며 기억하고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22,17-20 참조) 서로 섬기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루카 22,26-40 참조)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십니다.(루카 23,34 참조) 회개하는 이들에게 낙원을 약속하십니다.(루카 23,43 참조) 오후 세 시에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이 가르치고 보여주신 그 한없는 사랑을 이제 스스로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완성하고 계십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6-9 참조)라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바칠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마음을 새기려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나는 누구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지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길에서 자신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이제 한 주간 앞으로 다가온 부활을 준비하며,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 주간을 좀 더 의미 있게 가꾸어야겠습니다. 영원한 삶을 믿고 희망하는 부활 대축일에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필리 2,11)이시라고 기쁘게 고백합시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18면

[말씀묵상] 사순 제5주일

오늘 복음에서 유다교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에 대한 증오심에 사로잡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분을 잡을 정교한 함정을 파고 있습니다. 바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 하나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고 그 주위에 손에 돌을 들고 둘러선 채 간음한 이를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신명 22,21)을 실행해야 할지를 묻는 것입니다. 방금 현장에서 잡혔기에 여인의 죄는 재판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지체 없이 답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그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잡기 위해 놓은 덫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요한 8,6) 당시 유다에서 사형권은 오직 로마 황제의 대리자인 유다 총독에게 있었을 뿐 아니라, 로마법에 따르더라도 간음의 형벌은 사형이 아니었기에 율법을 따르라 하면 로마 황제의 권위에 저항하는 일이 되고, 그 여인을 놓아주라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어느 쪽을 선택하든 로마 황제나 유다 백성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두 선택 가운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평소 죄인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언행을 생각할 때 아마 그분께서는 여인의 죽음을 바라시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친로마적이던 사두가이들과 달리 로마에 저항하는 성향을 보였던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율법을 따라 로마의 미움을 사는 것보다 죄인을 풀어주어 백성의 신망을 잃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내심 그렇게 바라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간음 현장에서 여인을 잡았으면 간음 상대인 남자도 있었을 터인데(레위 20,10에 따르면, 그 또한 처벌의 대상입니다), 그는 그냥 두고 굳이 연약한 여인만을 끌고 온 것도 예수님의 연민을 자극해 자신들이 원하는 선택을 유도하려는 속셈에서였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질문을 들은 예수님은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예수님의 심란한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로 해석하고, 다른 이들은 로마의 재판관이 형을 선고하기 전에 먼저 기록하는 것에 비교합니다. 두 번째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죄를 물어 투석형으로 죽이려는 사람들의 죄를 땅에 쓰셨다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두 번째 해석이 더 그럴듯해 보입니다. 사실 성경은 죄인의 이름은 땅에 새겨지고(예레 17,13), 의인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된다고 합니다.(루카 10,20) 그리고 예수님은 군중에게 간음한 여인을 죽이라 혹은 살리라 말하는 대신 죄 없는 자 그를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돌을 놓고 물러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너희는 과연 죄가 없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들 또한 죄인들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죄를 지었을 때 심판하는 대신에 참아주고, 회개하기를 기다려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있는 자신들에게는 간음한 여인을 단죄할 권리가 없음을 깨닫고 돌을 내려놓고 물러갔을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정의와 자비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하지만, 예수님은 자비를 위해 정의를 포기하시거나 반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즉, 죄를 모른척하시거나 정당화하지도 않으시고, 죄인에게서 회개의 기회마저 빼앗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예수님은 자비로서 정의를 구현하십니다. 우리 모두도 죄인임을 깨달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런데도 우리가 지금 살아 숨 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 덕분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회초리 앞에서 마지못해하는 자백이 아니라, 주님의 따스한 시선에 이끌리는 진정한 회개가 시작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이 사순 시기에 특별히 다른 이들에게 조금은 더 자비로워질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가 자비를 입었으니,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8,7)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18면

[말씀묵상] 사순 제4주일

오늘 복음에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를 부자간에 견주며 가르치시려고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로, 구약성경에도 비슷하게 자주 등장하던 것입니다.(탈출 4,22; 이사 1,2; 예레 31,9.20 등) 특히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백성의 불충에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끌어안아 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호세아서 11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이는 또한 쥐엄나무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비유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고 탕진한 아들이 돼지치기가 된 뒤 배고픔에 시달리다, 돼지 밥이라도 먹기를 바랐지만 얻지 못했다는 대목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에 돼지 밥으로 나오는 ‘열매 꼬투리’가 바로 쥐엄 열매입니다. 이는 쥐엄 열매의 생김새가 콩꼬투리 같아서 우리말 성경에 그렇게 번역된 듯합니다. 쥐엄 열매는 껍질을 먹는데요, 맛은 초콜릿과 비슷하지만 끝맛이 떫어 즐겨 찾는 열매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건강에 좋다고 찾는 이들이 늘었지만 말입니다. 쥐엄나무는 히브리어로 하루브, 영어로는 캐럽(carob)입니다. 일명 ‘메뚜기 나무’로도 통합니다. 이는 히브리어 ‘하루브’가 메뚜기를 뜻하는 ‘하가브’와 비슷해서 그런 듯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 먹었다는 마르코복음 1장 6절의 메뚜기를 쥐엄 열매로 보기도 합니다. 늦여름부터 갈색으로 완숙하는 쥐엄 열매는 많은 양을 거둘 수 있으므로, 빈민의 구황작물이자 동물 사료였습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쥐엄나무가 가난의 상징이었지요. 그러다 캐럽(carob)이 캐럿(carat)으로 발전하며 부의 상징으로 뒤집히게 됩니다. 고대에는 쥐엄 열매의 씨가 무게를 재는 단위로 쓰였는데, 이것이 이후 보석의 단위로 신분(?)이 급상승하면서 마태오복음 19장 30절의 말씀처럼 꼴찌가 첫째 된 셈입니다. 다만 쥐엄나무는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나무입니다. 왜냐하면, 일흔 해가 지나야 첫 열매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쥐엄나무의 이런 특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바빌로니아 탈무드」 타아닛 23ㄱ에 나오는데요, 이는 ‘호니’라고 하는 한 의인에 관한 것입니다. 이야기 안에서 호니는 “주님께서 시온의 운명을 되돌리실 제 우리는 마치 꿈꾸는 이들 같았네”(시편 126,1)라는 구절을 읽습니다. 그러면서 바빌론으로 유배당한 이스라엘(기원전 6세기)의 ‘운명이 바뀌어’ 유배에서 풀려나는 데 일흔 해 걸렸는데(2역대 36,21) 어떻게 그 일이 잠들어 ‘꿈꾸는’ 동안 가능한지 연구하였답니다. 성경을 너무 자구적으로 해석한 사람 같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쥐엄나무를 심는 걸 보고, “그게 열매 맺으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 심느냐?”고 호니가 물었답니다. 그 남자가 70년이라고 답하자 호니는 “당신은 70년을 더 살 자신이 있나 보군요”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가 답합니다. “나는 내 조상이 심은 쥐엄 열매를 먹었소. 이건 내 후손을 위한 거요.” 그 뒤 호니가 밥을 먹고 깜빡 잠들었는데, 깨어 보니 어떤 남자가 열매를 모으고 있더랍니다. 호니가 그를 보고 “이 나무를 심은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의 손자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호니가 잠든 동안 일흔 해가 흐른 셈이죠. 놀란 호니가 집으로 가니, 아무도 그를 호니라고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호니는 슬퍼하며 하느님께 자비를 청한 뒤 쓰러져 죽었답니다. 이 이야기가 전달하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고통스러운 유배에서 구원받기까지 과정은 길어 보이지만, 일단 지나고 나면 꿈을 꾼 듯 쏜살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 그냥 건너뛰려고 하면 그 안에 담긴 삶과 추억을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이죠. 70년 자란 뒤 열매를 맺는다는 쥐엄나무는 우리에게 ‘인내’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 실린 여호수아기의 말씀도 기다림과 인내의 한 예를 보여줍니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하여 끝날 것 같지 않던 사십 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보낸 뒤,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 끝에 이집트의 ‘수치’를 떨치고 새 땅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옛것을 넘어 새것이 되도록”(2코린 5,17) 메시아께서 오시기까지,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기까지(2코린 5,21) 구약 시대 내내 기다려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세상에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8면

[말씀묵상] 사순 제3주일

오늘 제1독서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쳐서 결혼하고 아들을 낳아 양 떼를 치며 살아가던 모세에게 하느님이 나타나셨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오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명은 아닙니다. 이미 동족에게서 배척받은 과거가 있는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답하십니다. 그리고 이 수수께끼 같은 답은 수많은 신학자를 지금까지도 괴롭히고 있습니다. 우리도 함께 고민해 봅시다. ‘있는 나’라는 이름에는 분명히 어떤 보충설명이나 수식어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 수식어는 단순할수록 좋을 것이고 성서의 다른 부분이나 특히 탈출기 안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시는 당신의 성향이나 행동 양식 등과 맥락이 맞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탈출기 3장의 하느님 말씀에서 찾아보자면, 12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장의 곳곳에서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었고”,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탈출 3,7-10 참조) 보고, 듣고, 알기 위해서는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곳에 계시니 그런 의미에서 늘 함께 계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직접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그들을 데리고 올라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3,8) “(나는) 고난에서 너희를 끌어내어 …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3,17) 이 탈출기의 여정은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인간의 고통을 직접 겪으시고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를 통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구원의 길이 되신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이사 7,14),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는 이름을 그분은 받으셨습니다. 구약에서 ‘있는 나’로 희미하게 계시된 그분이, 신약에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더 구체적으로 당신의 파스카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함께 있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도 우리 역시 그분과 함께 있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과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일이 우리를 위한 본보기라고 말합니다.(1코린 10,5-6 참조) 예수님께서도 빌라도가 살해한 사람들과 사고로 죽은 이들을 언급하시며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무시하고, 배척하여 그분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생명을 주고 그가 열매를 맺었는지 찾아와 살펴보고 포도 재배인을 시켜 돌보시는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마찬가지로 멸망할 것입니다.(루카 13,6-9 참조)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교회와 성사를 통하여, 특히 당신의 파스카로 세우신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분과 함께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시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며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그분과 우리는 함께 하면서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요?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계명을 따라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사랑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래서 그분의 이름은 ‘함께 있는 분’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도 서로 함께 있도록, 그리고 그래서 우리가 그분과 함께하도록 지금 우리를 부르십니다. 요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참조) 사랑은 함께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화해하고 서로를 돕는 것입니다. 어렵고 혼란한 시기입니다. 서로를 탓하고 미워하고 외면하기 쉬운 때입니다. 하지만 구원의 길, 십자가의 길, 하느님의 길은 그것과 다릅니다. 그분은 당신의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지금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순시기를 맞아 제때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8면

[말씀묵상] 사순 제2주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는 말씀과 더불어 머리에 재를 얹으며 시작한 사순 시기가 벌써 열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온전한 믿음을 두는 아브람(아브라함)을 의로운 이로 인정하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셀 수 없는 하늘의 별들만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참조),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창세 15,7)라고 아브람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십니다. “주 하느님, 제가 그것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창세 15,8)라고 여쭈어보는 아브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삼 년 된 암송아지와 암염소와 숫양 각 한 마리를 반으로 잘라 마주 보게 하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각 한 마리는 자르지 않고 바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지나가게 하시는 신비로운 표징으로 아브람의 제물을 받아들이십니다. 아브람이 믿음으로 하느님께 ‘후손과 땅’의 축복을 약속받았듯이 우리도 주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축복,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수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신 예수님, 기도 중에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이 하얗게 변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에 대해 말씀을 나누십니다. 이 신비로운 광경에 할말을 잃은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구름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필리 3,17) 그러면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 세상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한편, 믿는 우리에게는 ‘하늘의 시민’(필리 3,20)으로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고대하라고 권유하십니다. 우리는 매년 성탄을 맞으며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하며 동방의 세 박사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하였듯이 각자 자신의 선물을 준비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의 근원이 되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부활하신 주님께 드릴 선물’을 충실히 준비하였으면 합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삶이 부활을 맞이하는 충실한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자신의 주머니를 비우는 자선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에 따라 애착하거나 집착하는 것을 비우는 자선이어야겠습니다. 또한 기도하며 하느님을 기억하고,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 삶 안에서의 근심, 걱정, 분심을 내려놓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일상의 음식만을 절제하는 단식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인간적 본능을 비우는 단식이어야겠습니다. 이러한 준비의 삶을 스스로 확인하며, 노력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부끄럽지만 저의 사순 시기 동안의 부활 선물 준비 체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사순 시기가 시작되면 커피 단식을 십여 년째 실천하고 있는데, 커피 단식의 절약분으로 이웃 나눔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2~3잔의 커피를 마시는 저로서는 처음 시작한 해에는 커피 단식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한결 어려움을 덜 느끼는 것이 좋은 지향과 실천에 대한 주님의 손길이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또한 몇 년 전부터는 음주 단식도 실천하고 있습니다. 커피 단식 외에도 무엇인가를 더 실천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저에게 평소 술을 즐기는 지인이 놀랍게도 사순 시기만 되면 술을 끊는 모습이 동기 부여가 되었습니다. 건강도 챙기고 이웃 나눔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사순 시기를 맞아 무엇을 안 한다는 것도 좋지만, 부활 선물을 준비하며 무엇을 한다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 최소한 하루에 세 번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에게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의 인생 여정, 특히 올 사순 시기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면 좋겠습니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8면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