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셀 수 없는 군중(묵시 7,9-17)

우세민
입력일 2025-05-21 09:44:26 수정일 2025-05-21 09:44:26 발행일 2025-05-25 제 3443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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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를 향한 보편적 구원을 노래

십사만 사천의 군중에 이어 셀 수 없는 군중이 등장한다. 십사만 사천을 유다계 그리스도인이라 해석하고, 셀 수 없는 군중을 이방인계 그리스도인들이라 해석한다. 하느님 백성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셀 수 없는 군중에 대한 서술을 시작으로 모든 백성에게 열려 있는 것이라고 대부분의 주석학자들은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이들이 셀 수 없는 군중이라고 요한묵시록 스스로 규정하고 있다.(7,9) 구원은 이제 모든 이를 향한다.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도 셀 수 없는 군중과 닮은 서사가 나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22,17) 구원은 애시당초 모든 이를 향해 있었다. 다만 모든 이를 위한 보편적 구원이 특별한 민족, 특별한 인간들에 의해 규정되면서 사달이 났다. 바빌론 유배(기원전 597~538년) 이후, 이른바 ‘유다이즘’을 형성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에 배타적인 사상을 더욱 공고히 가져갔고 저들만이 하느님의 구원에 합당한 민족이라 여겼다. 요한묵시록의 셀 수 없는 군중은 이런 배타적 민족주의를 여지없이 허물어뜨린다. 수를 세어 구원에 합당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은 지금도 폐쇄적인 사이비 종교나 배타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교회들 안에서 심심찮게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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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순교 복자 124위를 그린 김형주 <새벽 빛을 여는 사람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순교 복자들이 하느님 영광의 빛이 가득한 가운데에서 승리의 상징인 야자나무 가지를 흔들거나, 순교의 상징으로 십자가를 들거나, 동정의 상징으로 백합꽃을 들고 있다.

셀 수 없는 군중이 머무는 곳은 어좌와 어린양 앞이다. 요한묵시록 4~5장에서도 살펴봤듯, 어좌라는 곳은 천상에 유폐된 공간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함께 모여 온 곳이다. 어린양은 세상 모든 민족들을 모아 ‘사제의 나라’로 만들었다.(묵시 5,10) 요한묵시록 7장의 셀 수 없는 군중은 마치 사제처럼 어좌 앞에 서서 구원의 완성을 노래한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묵시 7,10) 요한묵시록 21~22장의 새 예루살렘에서도 같은 장면이 나온다. 세상 모든 민족이 모여오는 새 예루살렘에서 어좌에 앉아계신 하느님과 어린양은 경배와 흠숭의 대상이 된다.

셀 수 없는 군중은 구원의 영광과 기쁨을 가리키는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있다. 승리하는 이들이 드는 야자나무 가지 또한 들고 있다. 초대교회는 야자나무 가지를 순교의 승리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이해했다. 세상의 폭력 앞에 신앙은 무력하지만 끝끝내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승리한 것이라 초대교회는 이해했다. 야자나무는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초막절 예식에 사용된 것이기도 하다.(레위 23,40 이하)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을 향하는 구원의 길에 야자나무로 엮은 초막은 수없이 세워지고 옮겨지고 또다시 세워졌다. 

수난 동참하는 것이 환난이고
증거의 삶 살아가는 것이 구원
환난과 구원 분리하지 말아야

야자나무는 구원의 길의 고단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 갈망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복지를 향한 희망과 설렘의 상징이기도 했다. 요한묵시록 7장 15절은 초막절의 분위기를 더욱 뚜렷하게 묘사한다. 셀 수 없는 군중은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어좌에 계신 분은 셀 수 없는 군중을 위한 천막이 되어주신다는 것. 그러므로 요한묵시록 7장의 셀 수 없는 군중이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 구원을 노래하는 것은 이집트 탈출로 선명히 새겨진 구원이 모든 민족, 모든 시대를 향해 온전히 실현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구원은 보편적이며 현재형이다.

셀 수 없는 군중이 외치는 구원은 시편 118편 25절의 ‘호산나’(הוֹשִׁ֘יעָ֥ה נָּ֑א)를 닮았다. ‘구원을 주소서’라는 뜻의 ‘호산나’는 정확히 하느님과 어린양을 향한다. 구원의 주체이신 하느님을 향한 이 외침은 초막절에 야자나무 가지를 흔드는 순간 울려 퍼진 것이기도 하다. 호산나와 더불어 요한묵시록 5장 12절에 나타났던 찬미가가 셀 수 없는 군중을 통해 다시 등장한다.(묵시 7,12) 어좌, 스물넷 원로, 네 생물 모두가 셀 수 없는 군중과 더불어 하느님을 찬미한다. 온 우주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구원을 노래한다. 모든 이를 향한 보편적 구원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13절부터는 셀 수 없는 군중의 신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원로가 묻는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요한은 답하지 못했고 원로가 부득불 답을 한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마지막 날, 종말의 시간에 고통과 박해, 수난이 닥친다는 생각은 묵시문학의 전통적인 생각이다. 구원을 노래하는 군중이 환난을 반드시 겪어내어야 한다는 전통적 믿음은 다니엘서 12장 1절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우리의 요한묵시록은 환난과 구원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말 번역은 셀 수 없는 군중을 환난을 ‘겪어 낸’ 이들로 이해하는데, 그리스말 본문은 환난을 ‘겪고 있는’(그러니까, ‘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현재 분사형인 ‘에르코메노이’(ἐρχόμενοι)가 사용되었다) 이들로 소개한다. 환난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일이라서 끝난 게 아니다. 환난을 여전히 겪고 있는 이들이 구원을 노래한다. 그러나 환난을 부정적인 고통 자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어서 나타나는 구절에서 환난은 어린양의 피에 겉옷을 빨아 희게 만드는 일로 소개된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 환난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환난은 그러므로 지속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수난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구원이 또렷이 드러난다.

모든 이를 향한 구원을 노래하는 일은 이제 우리 삶의 자리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한다. 우리 삶이 예수의 삶과 닮았는가,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 길이 되는가, 그리하여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이 힘겨워도 행복한 삶이라 우리는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반성들이 구원을 이해하는 첫 번째 작업이어야 한다. 모든 이가 구원을 받을 만하지만, 모든 이가 십자가를 지는 데 덤벼들지는 않는다. 모든 이가 누릴 구원은 예수님의 증거의 삶이 지금 여기서 여전히 진행되어야 이루어진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를 내려놓게 해달라 기도하는 우리에게 과연 구원은 가능한 것인가. 우린 무엇을 증거하고 무엇에 승리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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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