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셀 수 없는 군중(묵시 7,9-17)

십사만 사천의 군중에 이어 셀 수 없는 군중이 등장한다. 십사만 사천을 유다계 그리스도인이라 해석하고, 셀 수 없는 군중을 이방인계 그리스도인들이라 해석한다. 하느님 백성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셀 수 없는 군중에 대한 서술을 시작으로 모든 백성에게 열려 있는 것이라고 대부분의 주석학자들은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이들이 셀 수 없는 군중이라고 요한묵시록 스스로 규정하고 있다.(7,9) 구원은 이제 모든 이를 향한다.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도 셀 수 없는 군중과 닮은 서사가 나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22,17) 구원은 애시당초 모든 이를 향해 있었다. 다만 모든 이를 위한 보편적 구원이 특별한 민족, 특별한 인간들에 의해 규정되면서 사달이 났다. 바빌론 유배(기원전 597~538년) 이후, 이른바 ‘유다이즘’을 형성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에 배타적인 사상을 더욱 공고히 가져갔고 저들만이 하느님의 구원에 합당한 민족이라 여겼다. 요한묵시록의 셀 수 없는 군중은 이런 배타적 민족주의를 여지없이 허물어뜨린다. 수를 세어 구원에 합당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은 지금도 폐쇄적인 사이비 종교나 배타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교회들 안에서 심심찮게 등장한다. 셀 수 없는 군중이 머무는 곳은 어좌와 어린양 앞이다. 요한묵시록 4~5장에서도 살펴봤듯, 어좌라는 곳은 천상에 유폐된 공간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함께 모여 온 곳이다. 어린양은 세상 모든 민족들을 모아 ‘사제의 나라’로 만들었다.(묵시 5,10) 요한묵시록 7장의 셀 수 없는 군중은 마치 사제처럼 어좌 앞에 서서 구원의 완성을 노래한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묵시 7,10) 요한묵시록 21~22장의 새 예루살렘에서도 같은 장면이 나온다. 세상 모든 민족이 모여오는 새 예루살렘에서 어좌에 앉아계신 하느님과 어린양은 경배와 흠숭의 대상이 된다. 셀 수 없는 군중은 구원의 영광과 기쁨을 가리키는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있다. 승리하는 이들이 드는 야자나무 가지 또한 들고 있다. 초대교회는 야자나무 가지를 순교의 승리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이해했다. 세상의 폭력 앞에 신앙은 무력하지만 끝끝내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승리한 것이라 초대교회는 이해했다. 야자나무는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초막절 예식에 사용된 것이기도 하다.(레위 23,40 이하)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을 향하는 구원의 길에 야자나무로 엮은 초막은 수없이 세워지고 옮겨지고 또다시 세워졌다. 수난 동참하는 것이 환난이고 증거의 삶 살아가는 것이 구원 환난과 구원 분리하지 말아야 야자나무는 구원의 길의 고단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 갈망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복지를 향한 희망과 설렘의 상징이기도 했다. 요한묵시록 7장 15절은 초막절의 분위기를 더욱 뚜렷하게 묘사한다. 셀 수 없는 군중은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어좌에 계신 분은 셀 수 없는 군중을 위한 천막이 되어주신다는 것. 그러므로 요한묵시록 7장의 셀 수 없는 군중이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 구원을 노래하는 것은 이집트 탈출로 선명히 새겨진 구원이 모든 민족, 모든 시대를 향해 온전히 실현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구원은 보편적이며 현재형이다. 셀 수 없는 군중이 외치는 구원은 시편 118편 25절의 ‘호산나’(הוֹשִׁ֘יעָ֥ה נָּ֑א)를 닮았다. ‘구원을 주소서’라는 뜻의 ‘호산나’는 정확히 하느님과 어린양을 향한다. 구원의 주체이신 하느님을 향한 이 외침은 초막절에 야자나무 가지를 흔드는 순간 울려 퍼진 것이기도 하다. 호산나와 더불어 요한묵시록 5장 12절에 나타났던 찬미가가 셀 수 없는 군중을 통해 다시 등장한다.(묵시 7,12) 어좌, 스물넷 원로, 네 생물 모두가 셀 수 없는 군중과 더불어 하느님을 찬미한다. 온 우주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구원을 노래한다. 모든 이를 향한 보편적 구원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13절부터는 셀 수 없는 군중의 신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원로가 묻는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요한은 답하지 못했고 원로가 부득불 답을 한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마지막 날, 종말의 시간에 고통과 박해, 수난이 닥친다는 생각은 묵시문학의 전통적인 생각이다. 구원을 노래하는 군중이 환난을 반드시 겪어내어야 한다는 전통적 믿음은 다니엘서 12장 1절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우리의 요한묵시록은 환난과 구원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말 번역은 셀 수 없는 군중을 환난을 ‘겪어 낸’ 이들로 이해하는데, 그리스말 본문은 환난을 ‘겪고 있는’(그러니까, ‘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현재 분사형인 ‘에르코메노이’(ἐρχόμενοι)가 사용되었다) 이들로 소개한다. 환난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일이라서 끝난 게 아니다. 환난을 여전히 겪고 있는 이들이 구원을 노래한다. 그러나 환난을 부정적인 고통 자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어서 나타나는 구절에서 환난은 어린양의 피에 겉옷을 빨아 희게 만드는 일로 소개된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 환난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환난은 그러므로 지속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수난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구원이 또렷이 드러난다. 모든 이를 향한 구원을 노래하는 일은 이제 우리 삶의 자리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한다. 우리 삶이 예수의 삶과 닮았는가,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 길이 되는가, 그리하여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이 힘겨워도 행복한 삶이라 우리는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반성들이 구원을 이해하는 첫 번째 작업이어야 한다. 모든 이가 구원을 받을 만하지만, 모든 이가 십자가를 지는 데 덤벼들지는 않는다. 모든 이가 누릴 구원은 예수님의 증거의 삶이 지금 여기서 여전히 진행되어야 이루어진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를 내려놓게 해달라 기도하는 우리에게 과연 구원은 가능한 것인가. 우린 무엇을 증거하고 무엇에 승리하고 있는가.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십사만 사천(묵시 7,1-8)

요한묵시록 6장까지 여섯 개의 봉인이 연거푸 열리다가 7장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른다. 일곱 번째 봉인은 8장부터 다시 이어진다. 7장은 6장의 마지막, 그러니까 어린양의 진노를 견뎌 낼 수 있는 이를 찾아 나서는 질문에 이어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 사람들은 어린양을 진노의 주체로 읽어내었고 이 세상은 그러므로 산과 바위 뒤에 숨어야만 하는 절망의 자리가 된 듯하여 허망하다. 그러나 이것이 끝인가? 요한묵시록 7장은 세상 사람들의 절망적 읽기에 또 다른 대답은 내놓는다. 7장은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후기 유다이즘은 천사들이 종말론적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주인공으로 이해한다.(에녹 60,11; 희년서 2,2) 요한묵시록 역시 천사가 불의 권한을 지녔거나(묵시 14,18) 물을 주관하는 것으로 소개한다.(묵시 16,5) 7장의 천사는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고 있다. 즈카르야서 6장 5절에서 영향을 받은 이 장면은 징벌의 시간 바로 전, 하나의 ‘멈춤’, 혹은 ‘쉼’을 상정한다. 하느님의 종 이마에 받은 인장, 주님 구원 뜻하는 명징한 은유 구원, 노력해서 얻을 수 없는 무한·보편으로 주어지는 선물 왜 멈추는가. 후기 유다이즘의 사상, 예컨대 노아의 홍수를 재해석하는 에녹서의 생각에서 얼마간의 답을 얻을 수 있다. 징벌을 준비하는 천사들이 있었다. 홍수를 쏟아부을 수 있는 천사들이었고,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야만 했다. 이에 주님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 수 있도록 천사들을 잠시 멈추게 한다.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찰지라도 주님은 구원에 대한 얼마간의 시간과 방도를 마련하신다는 이야기다.(에녹 6) 다시 요한묵시록으로 돌아오자면 7장에 등장한 천사들은 분명 징벌을 준비하고 있는 천사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바람을 붙들고 멈춤과 쉼을 이끌어내는 천사들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얼마간 간직하게 한다. 징벌이 잠시 멈추는 곳에서 기어이 희망을 찾아내어야 한다. 이야기는 구원을 향해 급하게 전환된다. 2절에 다른 한 천사가 ‘해 돋는 쪽’에서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올라온다. ‘해 돋는 쪽’은 구원을 상징한다. 에덴동산이 동쪽이었고(창세 2,8), 주님의 구원을 알리는 키루스 임금이 동쪽에서 왔고(이사 41,2) 하느님의 영광이 해 뜨는 동쪽에서부터 나타났다고 구약은 말한다.(에제 43,2) 하느님의 인장 역시 구원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인장은 징벌의 시간에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찍혀야 한다. 징벌이 잠시 멈춘 시간, 우리는 하느님의 종들을 보살피시고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발견한다. 하느님의 종들은 하느님께 온전히 속해 있어 종말을 맞닥뜨린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로 소개되는 ‘하느님의 종들’을 두고 유다계 그리스도인이라 해석하곤 한다. 열두 부족에서 시작한 십사만 사천이라 유다 전통과 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종들의 신원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은 특정 민족이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킬 때, 하느님의 종이라는 호칭은 요한묵시록에 자주 등장한다.(1,1; 2,20; 6,11; 19,2.5; 22,3) 말하자면 ‘땅의 자리’에서 속량되어 하느님에게로 온전히 의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표현이 ‘하느님의 종’이라는 것이다.(묵시 14,3) 하느님의 종들이 이마에 받은 인장은 또 무엇일까. 에제키엘서 9장 4절은 예루살렘에 징벌을 내리기 전에 구원받을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도록 주님께서 배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에제키엘서 9장 4절에서 ’표’라고 번역된 히브리말 ‘타우’(תָּו)를 두고 십자가의 예형으로 인식하여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되었다는 그리스도교적 해석이 있었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묵시록 7장에서 인장을 받은 하느님의 종들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라고 읽어내는 해석과 맞닿아 있다. ‘인장’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그 말마디를 두고 그리스도교의 세례와 연결하기도 한다. ‘인장’이라는 그리스말은 ‘스프라기스’(σφραγίς)로 세례와 같은 의미로 초대교회는 이해했기 때문이다.(2코린 1,21 이하) 어떤 해석이든 인장을 받았다는 것은 징벌의 순간에도 하느님의 보호는 분명히 살아 있다는 명징한 은유가 된다. 하느님의 종들의 숫자는 십사만 사천이다. 각 지파마다 일만 이천씩 나와서 총합이 십사만 사천이다. ‘12’는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고, ‘1000’은 풍성함, 충만함, 완벽함을 가리킨다. 하여 ‘1만2000’은 하느님 백성이 가득하고 완전하다는 뜻을 품는다. 여기에 다시 ‘12’를 곱해야 십사만 사천이 된다. 같은 수를 다시 곱하는 것은 묵시문학적으로 ‘마땅하고, 당연하여, 절대적으로 그러하다’는 의미다. 결국 십사만 사천은 하느님 백성이 진정으로 가득하고 완전하고 풍성하다는 수적 가치를 지닌다. 요한묵시록 7장 9절은 그리하여 십사만 사천의 무리를 ‘셀 수 없는 무리’라 규정하고야 만다.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실은 무한대의 사람이다. 요한묵시록이 숫자에 민감하여 여러 숫자들을 소개하고 제시하는데 대략적으로 보면 하느님과 어린양 쪽의 서술에서는 무한적이고 보편적인 숫자를, 악과 그의 부속 형상들, 예컨대 용과 두 짐승과 대탕녀 쪽의 서술에서는 한계지워지고 제한적인 숫자를 배치시킨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구원은 보편적이고 무한하나 악의 자리와 그 힘은 제한적이어서 무력하고 무능한 것이다. 요한묵시록 7장은 잠시 쉬어가는 대목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리기 전, 우리는 ‘구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구원은 십사만 사천, 그러니까 무한하고 보편적인 자리다. 구원은 특정 목적에 부합하는, 혹은 부합하고자 애쓰는 이의 특별한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그러니까 무한하신 하느님을 닮았다. 우리가 넓어질수록 구원은 뚜렷해진다. 우리가 좁고 좁아서 다른 이와 다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수록 구원은 그만큼 좁아지고 어려운 것이 된다. 구원은… 그러니까 주어진 선물이지 갖고 싶은 선물이 아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3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리다(묵시 6,12-17)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묵시문학의 전형적 장면들이 등장한다. 큰 지진과 천체의 혼돈이 그러하다. 대개 이단들은 이러한 혼돈을 신의 심판이나 징벌로 이해하곤 한다. 더욱이 어느 나라의 지진이나 해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현실의 사건들을 묵시록의 혼돈과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세상 종말의 문학적 수사를 실제 사건과 엮어내어 해석하는 일은 끔찍하다. 누군가의 희생을 빌미 삼아 묵시문학적 표현에 대한 설익은 해석을 내놓는 일은 폭력 그 자체다. 땅의 지진과 같은 묵시문학적 표현들은 구약성경 안에서도 발견된다.(아모 8,8; 9,5; 요엘 2,10) 후기 유다이즘, 그러니까 기원후 1~2세기의 묵시문학 작품들 안에서도 지진에 대한 서술은 흔하다.(2바룩 70,8) 태양이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것도 묵시문학의 전형적 은유다.(이사 50,3; 요엘 3,4) 당시 사람들은 끔찍한 사건이나 자연재해를 종말의 상징으로 해석했고, 그 재해가 두려울수록 하느님을 향한 간절한 외침은 뚜렷했다. 이를테면, 묵시문학의 재앙적 서술은 암울한 현실 안에 위엄하신 하느님이 직접 개입하신다는 신앙을 내포한다. 공포스러운 장면은 실은 하느님을 향한 한 줄기 희망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하늘이 두루마리 말리듯 사라져 버리고 산과 섬 또한 제자리를 잃어버리는 장면 역시 묵시문학적 표현이다.(느헤 1,5; 예레 4,24) 묵시문학이 서술하는 천체의 혼돈이 마지막 시대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을 암시하는 것이라면, 하늘이 사라지고 땅 위의 것들이 제자리를 잃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어야 한다. 물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국한된 관점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개입을 못마땅해하는 이들이나, 하느님의 개입이 인간 세상이 원하는 행복, 기쁨, 성공 등의 장면들로 묘사되길 원하는 이들에겐 천체의 혼돈은 불편하다. 만약 우리가 진정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라면,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는 장면에선 설레야 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세상은 온통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창세기 1장 6절에 하느님은 물을 갈라놓아 우주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창공을 만드시는데, 창공이라고 번역된 ‘라키아’(רָקִיעַ)는 ‘펼쳐진 공간’이라는 뜻을 가진다. 두루마리 펼치듯 생겨난 것이 창공, 곧 하늘이다. 프랑스 리옹의 성서신학자 프랑수아 마르탱은, 하늘이 두루마리 말리듯 사라져 버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두루마리 펼치듯 창공을 만드시기 이전, 그러니까 창조 이전의 시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묵시문학의 재앙적 은유들은 이 세상을 접고 새로운 세상을 펼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재창조를 암시한다는 해석이다. 이런 해석은 주류의 해석이 아니지만, 적어도 세상 종말을 끔찍한 사건들로 도배하는 묵시문학 작품들의 의도에는 부합하는 듯하다. 끔찍한 사건 앞에 주눅 들어 죄의식과 자책에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미래를 설계하고 기꺼이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섬세하게 다듬기를 바라는 의도 말이다. 요한묵시록의 서사 흐름이 천체의 혼돈 이후 7장에서 십사만사천의 구원받은 이들을 소개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천체의 혼돈은 하느님 안에 구원을 누리는 이들의 등장을 위한 사전 작업인 셈이다. 그러나 세상은 재창조를 원하지 않는다. 요한묵시록 6장 15절에 일곱 개로 분화된 사회 계층이 등장한다. 당시의 인간 사회를 총망라하는 계층 분화의 관습적 예를 보여준다. 땅의 임금, 고관, 장수, 부자, 권력가, 종, 그리고 자유인…. 힘과 재능, 그리고 노력과 우연이 뒤섞여 우리 사회는 다양한 계층으로 형성된다. 이른바 기득권은 그 계층 구조 덕에 누리는 이익이 있어 세상의 변화를 싫어한다. 그러나 경쟁에 뒤처져 기득권으로부터 멀어진 부류는 세상의 계층을 차별과 소외로 인식하며 변화를 갈망한다. 15절과 16절은 신분과 권력, 그리고 노력 여하에 따라 형성되는 계층 분화의 세상을 한꺼번에 없앤다. 모든 계층은 산과 바위를 향해 숨겨달라고 아우성이다. 호세아서 10장 8절의 영향을 받은 이 아우성은 하느님께 불충한 이들이 겪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다. 징벌을 감당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서 다만 숨기를 바라는 나약함의 아우성이다. 창세기 3장 8절의 아담과 하와도 그랬다. 하느님이 찾는대도 아담과 하와는 숨었다. 하느님처럼 되고자 열매 하나를 나눠 먹은 결과는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하는 인간의 처지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그리하여 하느님을 제대로 반기지 못하는 인간의 현실은 무언가 답답하고 서글프다. 본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고 돌보는 ‘관계적’ 존재로 지어졌는데, 인간은 숨어있다. 인간은 그러므로 인간답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인간에게 하느님은 ‘진노’(嗔怒)의 주체일 뿐이다.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는데,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 ‘주님의 진노의 날’은 마지막 때에 등장하시는 하느님의 위엄을 가리키는 전통적인 예언의 말마디다.(요엘 2,11; 말라 3,2) 요한묵시록은 진노의 자리에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언급한다. 앞서 요한묵시록 5장에서 어린양은 세상 모든 사람을 속량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했다. 세상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그분과의 인연을 다시 엮어 놓아 이른바 구원이란 걸 이루신 예수님을 ‘진노’의 주체로 해석하는 인간들의 아우성은 그리 달갑지 않다. ‘주님의 진노의 날’이 마지막 시대를 가리키는 시간적 은유라면, 그 마지막 시간에 우리는 주님을 어떤 모습으로 형용하고 은유할 것인가. 그 누구도 견디어 낼 수 없는 진노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당당히 반길 기쁨의 주체로 주님을 만나길 다만 바랄 뿐이다. 인간들의 아우성 이후에 요한묵시록 7장은 구원을 노래하는 십사만사천을 등장시킨다. 참 다행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어린양의 삶과 죽음(묵시 5,6ㄴ-14)

어좌 한가운데 자리 잡은 어린양은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살해된 것처럼 서 있는’(ἑστηκὸς ὡς ἐσφαγμένον) 어린양이 과연 가능한가. 죽었는데 서 있는 게 가능한 일일까. 주석학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하여 어린양의 모순적 양태성을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어린양은 분명 죽었고, 또한 분명 살아 있다. 죽음과 삶은 물리적 시간의 전후에 머무르지 않는다. 죽음과 삶은 하나다. 흔히들 말한다. 예수님은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하여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요한묵시록의 어린양은 이러한 이분법적 신앙 고백엔 그리 관심이 없는 듯하다. 요한묵시록은 삶을 죽음의 대척점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모두가 승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죽음을 물리친 자리가 아니라 여전히 죽어가는 자리를 동시에 껴안는 자리로 묘사된다. 그 이유는 너무나 뚜렷하여 선명하다. 우리 주 예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여전히 세상의 찬바람을 끝끝내 버티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사라진 게 아니다. 영원한 생명을 살아내는 신앙인 곁에 예수님의 죽음은 현실의 죽음 위에 포개져 사유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린양’의 형상은 단순히 역사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만을 놓고 고민한 결과가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위에 신앙인의 삶과 죽음이 포개져 ‘어린양’의 형상으로 소개된 것이다. 문법적으로 살펴봐도 그렇다. ‘살해된 것처럼 서 있는’으로 번역된 분사 형태의 동사들은 어린양을 꾸미는 형용사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스말은 남성, 여성, 중성을 문법적으로 구별하는데, ‘살해되었다’는 동사는 남성형 분사다. ‘어린양’(ἀρνίον)은 중성 명사이기에 중성인 명사와 남성인 동사의 결합은 문법적으로 틀린 것이다. ‘살해되었다’는 동사가 남성형이라서 몇몇 주석학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어린양을 통해 바라보지만, 중성인 어린양에 대한 해석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더욱이 ‘살해되었다’는 동사는 ‘스파조’(σφάζω)로 쓰여있다. 목을 잘라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다. 살해된 어린양을 굳이 예수님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한묵시록은 11장의 두 증인 이야기에서 주님의 죽음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이 잘려 죽은 이는 누구일까. 어린양이 중성 명사라면 굳이 남성으로서의 예수님만을 언급하기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예수님의 죽음에 신앙의 증거로 함께 한 모든 순교자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예수님의 죽음은 실은 많은 신앙의 증거로 피가 끓어오르는 생명의 자리가 아닐까. 어린양은 예수님을 증언한 신앙인의 숱한 죽음 위에 새롭게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의 삶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역사적 사실관계에 머물러 성경을 읽다 보면 무리수가 발생한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신앙의 해석과 상상을 가미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역사의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모든 신앙인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은 그분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그분의 죽음마저 우리에겐 생명의 선물로 사유하고 상상하는 자유를 어린양을 통해 마련하신다. 예수님을 두고 상상을 펼쳐나가는 요한묵시록 5장은 6절 후반부터 우주론적인 차원으로 뻗어 나간다. 권능을 가리키는 뿔과 지혜를 암시하는 눈을 각각 일곱 개씩 가진 어린양은 하늘과 땅을 이어놓는 친교의 상징체로 소개된다. 어린양의 일곱 눈이 온 땅으로 파견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공간은 천상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양의 눈은 땅으로 파견되어 하늘과 땅이 어린양의 형상 안에 통합되는 것이다.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는 이러한 친교와 통합을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묵시 5,9) ‘주님의 피로’라고 번역된 그리스말은 ‘너의 피로’(ἐν τῷ αἵματί σου)라고 되어 있다. 천상의 ‘어린양’은 지상을 대표하는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에게 ‘너’라는 친근한 이웃이 된다. 어린양은 자신의 희생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을 하느님께 이끌었다. 묵시문학은 ‘모든’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네 가지 범주로 표현하는 습성을 지닌다. 모든 민족이라고 해도 충분할 터인데, 굳이 종족, 언어, 백성, 민족으로 구별하여 표현한다. ‘모든 이’가 진정으로 ‘모두’, 어린 양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으로 어린양을 통한 신앙의 상상은 마무리된다. 천상의 주님이 지상의 ‘너’가 되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너의 피’, 곧 예수님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속량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말 동사 ‘아고라조’(ἀγοράζω)는 다분히 상업적 의미를 지니는데,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물건을 구입할 때 사용하는 동사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희생을 부정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한 필연적 과정 혹은 치러야 할 대가를 말할 때 이 동사를 사용한다.(1베드 1,18 참조)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거저 우리 사람을 구원하신 게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라서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신 게 아니란 말이다. 하느님은 참된 인간으로서 바보 같은 죽음을 맞닥뜨리셨고 바보같이 돌아가셨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친교의 원동력은 끝없이 내려놓고 비워내고 스스로를 대가로 지불하는 하느님의 바보 같은 사랑 덕분이었다. 예수님은 오늘도 어린양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에게 주어진 나날들은 실은 죽어가는 시간의 연속이다. 죽음이 생명일 수 있는 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이 세상 모든 이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봉인을 열어 보이실 어린양은 그러므로 새롭고 신비한 천상의 놀라움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끝내 살아내는 숱한 일상의 희로애락을 다시금 살펴보게 할 것이다. 그 일상이 죽음을 향할지라도 우리 믿는 이들에겐 천상이요, 생명이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3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한가운데 더불어 하나 되는(묵시 5,1-6ㄱ)

요한묵시록 5장의 주된 질문은 이러하다. “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 누구인가?”(묵시 5,2) 어린양의 등장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하늘과 땅 위, 땅 아래 모든 곳을 살펴봐도 오직 어린양만이 봉인을 펼 수 있다고 서술한다. 요한묵시록 5장의 서술은 어린양에게 집중된다. 요한은 어린양을 찾을 때까지 울었다.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울음’은 어린양에 대한 집중도를 더욱 부각시킨다. 천상의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향한 시선이 어린양을 향해 변화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구약의 하느님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어좌에 앉으신 분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가 어린양에게 전해진 건, 요한묵시록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느님 섭리의 연장이고 완성이라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루마리는 안과 밖으로 쓰여 있는 글묶음이다. 전통적으로 안의 것을 신약성경으로, 밖의 것을 구약성경으로 이해하곤 했다. 이미 알려진 구약의 내용을 신약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해 주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라틴 교부들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설명하는 유명한 문구와 일맥상통하는 해석이다. “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Vetus in novo patet.”(신약은 구약 안에 숨겨져 있고, 구약은 신약 안에서 밝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해석은 요한묵시록 5장의 서사 흐름과 얼마간 상이한 점이 있다. 어린양에게 주어진 두루마리는 ‘읽히기 위한 글묶음’이 아니다. 진즉에 주어진 질문은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는 이’를 찾는 것이었다. 어린양은 물론이고 요한묵시록은 두루마리 안과 밖의 내용에 대해선 침묵한다. 두루마리는 읽히는 것이 아니라 열리는 것의 상징이다. 그리고 열기 위해 등장하는 어린양이 누구인지에 대한 읽기가 우선이어야 한다. 어린양은 사자와 연동되어 서술된다. 전통적으로 메시아와 그 집안을 가리켰던 힘센 사자가 요한의 눈에는 어린양으로 나타난다. 사자와 어린양은 힘의 구도 속에 공존할 수 없는 두 동물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구약의 전통과 신약의 새로운 해석이 서로 부딪히나 그럼에도 만나고 있음을 감지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 인간의 새로운 해석과 상상 안에 다양한 상징과 은유로 서술되고 전파된다. 미국의 성경학자 웨인 A. 믹스(Wayne A. Meeks)는 한 세미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은유의 상징으로 소개했다. 그 자리에서 다른 성경학자는 은유라는 표현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비판의 요지는 “십자가는 문자적 사실”이라는 것. 사도 바오로에 의해 십자가가 소개되고 서술되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사실적 요소를 바탕으로 적혀졌다는 이른바 역사비평적 견해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 비판에 웨인 믹스는 이렇게 답했다. “십자가가 은유가 아니라면 그저 나무 두 토막을 겹쳐놓은 것 뿐”이라고. 개인적으로 웨인 믹스의 견해는 요한묵시록을 읽는 데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수많은 시간들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새로운 은유와 상징으로 신앙인들 안에 소개되고 전파되어야 한다. 하나의 글과 표현에 얽매여, 그 글과 표현을 ‘사실’이라고 우겨대는 완고함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하느님을 인간의 한계지워진 인식과 사유 안에 가두어 버리는 교만일 뿐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 하느님은 또 어떤 식으로, 어떤 상징으로 해석될 것인지, 그리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좀 더 가까이, 그들의 폐부 깊숙이 닿아 있는 하느님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 교회는 고민해야 한다. 사자를 어린양으로 새롭게 소개하는 요한묵시록의 해석을 좀 더 세심히 살펴보자. 어린양은 홀로 자랑스런 사자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어린양의 공간적 형식을 가리키는 ‘한가운데’(ἐν μέσῳ)라는 말마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말 성경 번역은 어린양의 공간을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로 해석하지만, ‘사이’가 아니라, ‘한가운데’이다. 어린양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어좌에 앉으신 분과 지상의 하느님 백성인 스물네 원로, 어디든 계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현존을 가리키는 네 생물과 ‘하나의 공간’ 안에 함께한다. 그러니까 어린양은 특정 공간이나 지위를 바탕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어린양은 시공간의 배타적 인물이 아니라 모든 시공간을 아우르는 친교의 장으로서 현존하시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다, 저런 분이시다 고백하는 건 쉬운 일이나 이런 분도, 저런 분도 되신다는 사실을 겪는 건 때론 고통스럽다. ‘내가’ 찾아 나서는 메시아가 뚜렷할수록, ‘우리의’ 메시아는 흐릿해질 수 있다. 예수님은 특정 개인의 구세주가 아니라 선인이나 악인이나, 죄인이나 의인이나, 아픈 이나 성한 이나 모두에게 구세주라는 사실은 때론 따뜻한 이야기이나 때론 불편하여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 나와 불편한 이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사랑으로 다가오신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야 하는 신앙의 당위이지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거북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린양을 살펴본다는 것은 긴 호흡과 용기를 필요로하는 일인지 모른다. 지금 글을 쓰는 순간에도, 오늘의 예수님은 또 어떻게, 어떤 이들을 향해 당신의 보편적 사랑을 전개하고 펼쳐나가실지 질문해 본다. 민감하여 함부로 이야기하기 힘든 정치, 경제, 사회의 이슈들로 우리나라가 오늘처럼 두 쪽으로 완전히 갈라진 험악한 순간에도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실지 고민해 본다. 뜻이 안 맞는다며 내뱉는 단절과 배타의 언어에 우리는 참담했고, 그로써 우리는 조금씩 안정과 평화를 이 나라 이 땅에 만들어갈 것이다. 어린양은 늘 우리 ‘한가운데’ 저 혼자 돋보이지 않고 더불어 하나 되는 데 당신을 온전히 내어놓으실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라오디케이아에 보내진 편지(묵시3,14-22)

라오디케이아는 기원전 3세기 안티오쿠스 2세에 의해 건립된 도시다. 에페소와 동쪽 지역을 잇는 도로 가운데 위치하여 상업적으로 번성한 곳이었다. 로마의 문인 키케로에 의하면 라오디케이아는 재정과 금융의 주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섬유 산업, 특별히 양모 산업이 발달했고 귓병에 좋다는 고약과 눈병에 좋다는 약재도 라오디케이아에선 유명했다. 우리가 읽는 편지도 안약을 언급하고 있다. 라오디케이아는 경제적으로 강했고 그로 인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묵시 3,17)라고 할 만큼. 그러한 라오디케이아는 60년경 지진으로 몰락하고 만다. 교회공동체에 전해진 우리의 편지도 부유함, 혹은 풍족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자만과 우월 의식에 대한 비판이 편지가 쓰인 동기 중 하나다. 편지를 보낸 ‘사람의 아들’은 ‘아멘’(ἀμήν)으로 소개된다. 신약성경에서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을 두고 ‘아멘’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탈리아의 요한묵시록 전문가인 우고 바니(U. Vanni)는 ‘아멘’이라는 호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의 ‘하나 됨’을 언급한다. 예수님은 신앙 공동체와 하나 되어 육화하신 우리의 하느님이시라는 것. 편지가 교회공동체 내의 자만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상관없는 이를 향한 일갈이 아니라 자신과 하나 된 이를 생각하는 애틋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창조의 근원’으로 소개된다. 유다 사회는 창조 때의 하느님을 지혜와 연결하여 사유하곤 했다. 예컨대 잠언 8장 22절부터 23절까지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특별히 사도 바오로에 의해, 창조의 근원으로 예수님을 상정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콜로 1,15-16) ‘아멘’으로서, ‘창조의 근원’으로서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 되어 모든 시공간, 그리고 만물을 또한 하나로 엮어내는 분이시다. 요컨대 사람의 아들은 ‘모든 것의 정점이자 모든 것, 그 자체’로 소개되신다. 모든 것은 부분적인 것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 됨은 갈라짐을 배제한다. 다른 어떤 것에 휩쓸리거나 다른 무엇이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신심을 흔드는 경우는 없어야 했다. 그러나 라오디케이아는 “미지근”(묵시 3,16)했다.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신심은 ‘적당한 수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그노시스, 그러니까 영지주의적 사고에 젖은 신앙 공동체를 향한 비판이라 해석한다. ‘미지근’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에 세상의 가치가 혼재되어있는 상태를 말한다. 교회는 옳고 세상은 그른 것이어서 그른 것이 옳은 것을 침탈하고 방해한다는 이원론적 혼돈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올바름과 신앙의 올바름, 세상의 지고한 지혜와 신앙의 지혜를 분별없이 무턱대고 동일시하는 이른바 ‘혼합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이를테면 세상과의 호흡이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고, 세상과의 불협화음보다는 친교와 사랑, 그리고 화해의 이름으로 세상과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자세로 인식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 중에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세상에 맞서지 말고, 우상숭배든 황제숭배든, 그리스도를 믿더라도 적당히 세상의 분위기에 젖어 들 줄도 알아야 현명한 신자’라는 것. 이것은 함께 호흡하는 게 아니라 타협하는 것이었다. 어정쩡한 신앙의 고백은 신앙의 본질을 비껴가서 세상과 교회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세상의 것을 더 알고, 세상과 타협하고, 그럼으로써 보다 훌륭하고 모범적으로 산다는 것은 대체로 좋은 일이나, 그러한 것이 신앙적인 것과 동일시되는 것에는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 외경 중 하나인 토마스복음에 따르면,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일은 물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나체가 되는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토마스복음 21,37 참조) 우리가 얼마 전 읽은 스미르나에 보내진 편지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있다.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사실 부유하다.”(묵시 2,9) 초대교회는 세상의 물질적, 혹은 정신적 성장과 부유함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세상보다 더 깊고 넓은 지혜를 소유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 속 가장 낮은 곳에서, 때론 숨죽이고 때론 저항하며 버텨내는 삶을 살아서 그렇다. 세상이 모두 옳고 그름을 논박하며 가장 멋진 삶, 가장 훌륭한 삶을 외칠 때,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살아내느라 세상의 손가락질과 모욕을 참아내며 살아야 했다. 죄지은 자, 병든 자, 세상의 상식에 벗어난 자를 ‘형제’요, ‘자매’라고 칭하며 어떻게든 용서와 화해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었으므로 세상의 모욕은 신앙의 부유함이었고 풍족함이었다. 세상의 지혜와 부유함이라는 겉옷 위에 신앙을 액세서리로 꾸며내는 일보다는 우리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하느님 앞에 진정 부유한 일이다. 사도 바오로는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다”(콜로 2,3)고. 우리에게 진정 보물은 무엇인가. 우리의 편지 안에서도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고 함께 먹고 마시는 일(묵시 3,20 참조), 예수님의 어좌에 함께 앉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묵시 3,21 참조)이 그것이다.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요즘 자주 묻는다. 담배 끊고, 술 끊고, 심지어 피정의 이름으로 효소 단식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잦다. 제 한 몸 가꾸는 일이야 현대인의 필수 덕목에 가깝지만, 우리의 신앙이 제 마음의 평온이나 제 몸의 가벼움에 집중하는 일인가 자주 묻게 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배고팠고 예수님도 그랬다. 수많은 신앙의 증거자는 생명에 배고파 생명을 내던졌고 세상에 실패하며 신앙 안에 승리했다. 세상을 평온히 사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한다면 우린 왜 성당에 다녀야만 하는가, 나는 자주 묻게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필라델피아에 보내진 편지(묵시 3,7-13)

필라델피아는 다른 곳과 달리 상대적으로 늦게 건설된 도시다.(기원전 2세기 중반) 페르가몬의 왕이었던 아탈로스 2세 필라델피아에 의해 세워져 그의 이름으로 불린 도시였다. 기원후 17년경 지진으로 무너진 후,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기도 했다. 화산이 많은 지역이라서 약한 지진이 빈번했지만 비옥한 토양이 있어 여러 도시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교회와 관련해서는 스미르나에서 폴리카르포가 순교할 때, 필라델피아의 그리스도인 열한 명이 함께 순교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신앙에 관한 한, 필라델피아는 순수했고 열심이었다. 그래서일까. 필라델피아에 보내진 편지에는 비판이나 꾸지람이 없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라고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문의 형상에 빗대어 열고 닫는 데 절대적 권능을 가진 이로 묘사된다. 문을 열고 닫는 권능의 이야기는 엘야킴에게 왕국의 권력이 이양되는 장면에서 나온다.(이사 22,22) 엘야킴에게 문을 열고 닫는 데 필수적인 다윗의 열쇠가 주어지는데, 하느님의 구원이 다윗 가문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은유의 표현이다. 요한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 가문 안에 배치한다.(묵시 3,3; 22,16)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님 안에 수렴되고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필라델피아 교회에 주어진 문은 ‘열려진 문’(묵시 3,8)이다. 이제 문은 닫힐 리가 없다.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구원은 열려진 문이라는 형상을 통해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 바오로 사도 역시 ‘열려진 문’을 복음 선포의 보편성을 가리킬 때 사용했지 않던가.(1코린 16,9; 2코린 2,12; 콜로 4,3) 요한묵시록 21장에 가면 천상 예루살렘의 문도 사방으로 모두 열려 있다. 사실, 필라델피아는 ‘힘이 약하다.’(묵시 3,8) 모든 것을 감내하고 모든 이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필라델피아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내는 데는 실패하지 않았다. 약한 힘이 믿음을 지켜내는 데는 강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건,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물이 아닐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되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징한 일이다. 믿음의 단순성은 주변 것들에 휘둘리는 일희일비의 가벼움을 걷어내는 것이기도 하겠다. 우리의 편지는 10절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네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 우리말 번역은 정확하지 않다. 다시 고쳐 번역하자면 이렇다. ‘왜냐하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으니…’가 된다. ‘나의 인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가리킨다. 본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당연한 운명으로 이해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세상살이 자체가 그리스도인들의 자리고 그 자리는 악을 제거하고 비워낸 천상이 아니라 악과의 투쟁 안에서 끊임없이 예수님을 갈망하고 찾아 나서야 하는 자리다. 필라델피아 교회도 ‘땅의 주민들’의 시험 안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묵시 3,10) 세상의 우상숭배와 악함을 말할 때 사용된 ‘땅의 주민들’은 필라델피아 교회가 살아내고 있는 ‘삶의 자리’다.(묵시 6,10; 8,13; 11,10; 13,8.12.14; 17,2.8)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 한 분을 향한 단순한 일이라면 우리 생애의 복잡다단한 일들은 대부분 부수적인 것이 된다. 부수적인 것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경우도 많다. 상대적인 것들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제 인식을 진리의 기준으로 착각하며 행동하는 가벼움이 이 세상을 갈라놓고 찢어놓는다. 과연 우리는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내 삶의 조각들’로 여기는가. 주어진 조각들 하나하나를 예수님을 향해 맞추는가. 아니면 이런저런 조각을 내던지며 있지도 않을 새로운 조각을 갈망하며 애태우는가. 필라델피아 교회는 수많은 삶의 조각들을 제 것으로 당겨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아내었다. 오직 예수님을 갈망하며. 그래서 필라델피아 교회는 참된 유다인이다.(묵시 3,9) 세상이 유다인이라고 인식하는 혈육의 유다인을 ‘사탄의 무리(회당)’라고 거칠게 비난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참된 유다인이라 말한다. 학자들은 필라델피아 내에 벌어지는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갈등을 생각하곤 한다. 추정컨대, 그리스도인의 복음 선포가 유다인의 혐오와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요한묵시록은 지금 필라델피아 교회를 위로하고 있다. 박해 속에 살아가도, 제 힘이 약해 세상에 억눌리더라도 그 속에서 참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놓치지 않는 일, 매우 어려운 그 일로 필라델피아는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유다인들이 누릴 복된 시간을 요한묵시록은 필라델피아 교회에게 돌려놓는다. 그리스도인들의 발 앞에 유다인들이 엎드리게 하겠다는 말씀(묵시 3,9; 이사 45,14 참조), 그리스도인을 하느님 성전의 기둥으로 삼겠다는 말씀(묵시 3,12·유다 사회는 아브라함을 ‘세상의 기둥’으로 이해했다), 세상 구원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승리하는 이에게 새기겠다는 말씀들이 힘겨운 시간을 살아갔던 필라델피아 교회에겐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 된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승리를 가리키는 ‘화관’을 ‘이미’ 쓰고 있었다.(묵시 3,13) 힘이 약하고 박해 속에 겨우 살아내고 있지만 필라델피아 교회는 ‘승리’하는 중이었다. 이 세상살이 자체를 제 운명으로 꼭 껴안고 있는 필라델피아에겐 이겨야 할 대상도, 이겨서 얻는 저만의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예수님처럼 오늘 하루를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열린 문이 행여 닫힐세라 그렇게 구원을 지켜내며 필라델피아는 승리하고 있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사르디스에 보내진 편지(묵시 3,1-6)

한때, 아시아의 동쪽과 서쪽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던 사르디스는 서기 17년 큰 지진으로 황폐한 곳이 되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사르디스의 재건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과세를 면제하기도 했다. 물론 황제를 위한 신전이 세워지기도 했다. 유다인들의 영향력도 제법 강한 곳이어서 사르디스의 공적인 일들에 유다인들의 참여 또한 활발했다. 사르디스에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묵시 3,1)다. 1장 4절에 일곱 영은 하느님의 성령을 가리키고 1장 20절에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대표격인 일곱 천사를 지칭한다. 하여 사르디스가 소개하는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과 교회,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절대적 주권을 지닌 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은 사르디스 공동체가 ‘한 일’을 안다고 말씀하신다. 그 일이란 게 좋은 일, 모범적인 일이 아니다. 사르디스 공동체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살아 있다고 여겼으나 사람의 아들은 ‘너가 죽어 있다’고 직격하기 때문이다.(묵시 3,1) 사르디스가 ‘한 일’은 죽음을 가리키는 상징이었던 셈이다. 무언가 해내고 있는데,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오히려 자멸하게 만드는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빌려오면 이렇다. “겉으로는 신심이 있는 체하여도 신심의 힘은 부정할 것입니다.”(2티모 3,5) 신심 있는 듯 행동하지만 자신과 돈, 그리고 제 욕망을 추구하는 일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신앙 생활하는 이들을 가리켜 사도 바오로는 ‘신심의 힘’을 부정한다고 비판한다. 사도 야고보도 마찬가지 말씀을 남긴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야고보서가 말하는 실천은 ‘형제애’와 관련된 것이다. 저 혼자 배부른 삶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삶을 꿈꾸는 것이 믿음이 걸어 나가는 ‘생명’에로의 길이다. 그러므로 ‘깨어있어야’ 한다.(묵시 3,2) 깨어있음은 두 눈 부릅뜨고 제 인생을 갈고 닦는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 제시된 명령이 아니다. 살아 있으되 죽은 것으로 규정된 사르디스 공동체가 깨어있음을 실천해서 얻어 내야 할 것은 ‘생명’이고 그 생명에로의 추구는 결국엔 서로에 대한 개방과 환대의 실천 유무에 달려있다. 3장 3절의 ’회개’라는 말마디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근대 이후 사람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개인’의 가치가 도드라지게 되면서, 회개라는 말마디를 개인적인 반성이나 성찰의 관점에서 해석해 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본디 회개는 ‘서로를 향해 돌아선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타자성’을 빼놓고선 회개를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회개는 사람됨의 근본 이유이자 목적일 수 있으리라. 사람은 ‘사회적 관계’ 안에 살아갈 존재이고 그 관계 속에서 비로소 사람다움을 이야기하고 실천하고 다듬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사르디스에 보내진 편지를 읽으면서 주목해야 할 동사가 있다면, ‘받아들이다’라고 번역된 ‘람바노’(λαμβάνω)가 될 것이다.(묵시 3,3) 요한복음은 육적인 완고함이나 배타성에서 해방되어 복음에로 열려 있음을 논할 때 이 동사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깨어있을 수 없다. 회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또 한 번 빌려오자.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3-14) 듣고 받아들이는 것을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 여기며 저 혼자 기도하고 묵상하는 일은 저만의 외로운 고행이 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저 혼자만의 신앙에 대해 경고했다. 선포하는 이, 그리고 듣는 이의 형제적 친교와 일치 안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복음서에서 여러 번 강조되기도 했다. 하느님 나라는 저 천상에 홀로 고립되어 있어 몇몇 의인이나 영웅들에게만 드러나는 밀교의 왕국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 한가운데 이미 드러나 있다.(루카 17,20-21) 깨어있음을 살아내야 할 사르디스 공동체가 여전히 죽어갈 때, 곧 스스로 유폐되어 서로를 향한 회개를 살아내지 못할 때, 사람의 아들은 ‘도둑’이 되어 ‘갑자기’ 나타나신다.(묵시 3,3) 사람의 아들이 ‘도둑’처럼 온다는 표현은 전형적인 종말의 심판을 가리키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도둑’으로 만나서는 안 될 일이다. 신앙인이 살아내야 할 회개의 자리, 친교의 자리는 예수님이 ‘도둑’이 아니라 ‘벗’으로서 다가서는 자리이므로. 믿음을 시작한 이래, 우리는 부족할지언정 스스로를 더럽히진 말아야 하겠다. 말하자면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겠다.(묵시 3,4) 14장 4절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14만4000에 대해 말한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이들은 흠도 결도 없이 오로지 예수님 안에 더불어 살아간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는 이들이다. 놀라운 일은 예수님을 향하는 것이 비로소 스스로의 이름을 지켜내는 일이라는 것.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그런 이들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기 때문이다.(묵시 3,5) 사르디스는 지진 후 다시 살아난 도시였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역사적 자료가 희박하여 사르디스라는 도시가 지녔던 재건에의 역동성과 그 희망에 대해 추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주석이 힘들면 해석의 상상력을 펼쳐보면 어떨까. 저마다 ‘한번 해 보자’며 미래의 달콤한 삶을 향해 덤벼드는 분위기, 거기에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했던 유다인들 마저 도시의 공적인 일에 열심히 뛰어드는 분위기, 그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어떠해야 할까. 저마다 희망을, 노력을, 성공을 이야기할 때, 그리스도인은 희망 뒤편에 쓰러진 절망의 사람들을 살려야 하지 않을까. 저마다 무언가 해내야만 한다고 핏대를 올리며 외칠 때, 그리스도인은 아무 일도 못 한 채 하루를 버텨내는 이들에게 ‘회개’라는 일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도시의 재건은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살리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티아티라에 보내진 편지(묵시 2,18-29)

티아티라는 여러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빵, 염색, 가죽 공예 등의 산업으로 꽃을 피운 곳이었다. 각각의 산업 분야마다 상인 조합들이 형성되었고, 장사를 할라치면 그 조합에 가입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물건을 사고파는 경제적 공동체는 그 공동체가 자리 잡은 곳의 문화적, 종교적 관습을 담아내기 마련이다. 티아티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이방 문화와 종교에 가담할 수 밖에 없었던, 혼합종교의 삶을 살아간 곳이 티아티라였다. 티아티라에 편지를 보내는 이는 “하느님의 아들”(묵시 2,18)로 소개된다. 요한묵시록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하느님의 아들’이란 호칭은 28절 ‘아버지’라는 표현과 맥을 같이 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그분이 간택한 이를 아들로 엮어내는 것은 다분히 구약의 메시아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시편 2,8-9)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묵시 2,18)로서 하느님의 아들은 어느 누구도 대적 못 할 강한 힘을 지닌 듯 하다. 그 힘의 뒤편엔 그 어디에도 눈을 돌리지 말고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그리하여 하느님의 아들이 분명히, 강력히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라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도 존재한다. 티아티라는 사랑, 믿음, 봉사에 투철했다. 그럼에도 이제벨이라는 여자를 용인하는 것이 티아티라에 보내는 편지의 문제 제기다. 이제벨은 아합왕의 아내였고 바알신을 섬기도록 부추긴 여자였다.(1열왕 16,31) 하느님을 버리고 바알을 좇는 일은 예후에 의해 ‘불륜’으로 비난받기도 했다.(2열왕 9,22) 이제벨은 과거의 여자였으나 현재 티아티라의 상황을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은유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벨은 “예언자로 자처”(묵시 2,20)한다고 서술한다. ‘예언자’라는 말마디를 통해 학자들은 티아티라에서 몬타니즘이 성행했던 사실에 주목한다. 2세기부터 시작된 몬타니즘은 성령을 통한 환시와 황홀경을 중시하고 극단적 엄격주의를 통해 선민주의적인 행태를 보인 이단의 한 형태다. 몬타니즘은 특별히 여성 예언자, 예컨대 프리쉴라, 막시밀라, 암니아와 같은 여 예언자를 통해 활성화되었는데, ‘과거의 여성’ 이제벨을 소개하는 티아티라의 편지는 이러한 몬타니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이제벨로 대변되는 신앙의 일탈은 무엇이었을까. 몬타니즘을 배경으로 추정해보면 이렇다. 이제벨과 그를 따르는 무리는 특별한 영적 체험에 대한 과도한 맹신에 집착했을 것이다. 저만이 특별한 계시에 초대받았다는 증거가 환시나 황홀경의 체험으로 특정되었고 그 체험이 더욱 견고해지면서 다른 이들에 대한 비교우위의 배타적 신심에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초대교회의 관심사 중 단연 제일은 예수님의 재림이었을 테고, 그 재림이 무엇이고 누가 그 재림에 합당한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어서 두려운 질문으로 남아 있었을 테다. 이제벨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두려운 질문을 자신들의 체험 안에서 명확한 정답으로 읽어내고 싶었을 것이고, 자신들의 영적 체험과 신앙적 신념을 절대화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보다 자신의 체험과 신념이 더 중요해진 신앙을 우리 성경은 ‘불륜’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불륜의 끝은 ‘죽음’이라고 티아티라에 보내진 편지는 분명히 한다.(묵시 2,23) 신앙의 일탈은 나쁜 짓, 악한 짓을 저지를 때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신념과 행동방식을 객관화하지 못하는 데서 신앙의 일탈은 훨씬 심각한 것이 된다. 저만이 하느님의 신비를 제대로 꿰차고 있다는 착각 속에 다른 이들의 신앙 감각과 체험에 대해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완고함과 거만함이 신앙을 왜곡한다. 이제 신앙은 저만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그 누구의 말도, 조언도, 비판도 쓸모없는 것이 된다. 철저히 고립된 자신이 세상의 박해 속에 살아가는 진정한 신앙인인 양 고뇌하며 살아간다. 자기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곳에 하느님은 허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은 손가락 사이 무심히 흘러내리는 모래 한줌처럼 힘없이 사라질 뿐이다. 그 허상을 하느님이라 믿어 고백하는 일, 참 허망한 일이 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아들은 티아티라에게 다른 짐은 지우지 않겠다고 하신다.(묵시 2,24) 다만 끝까지 지켜야 하는 일 하나를 제시하신다. 이제벨과 그 추종자들이 말하는 ‘사탄의 깊은 비밀’을 알려고 하지 않는 이들에게 제시하신다. ‘깊은 비밀’이란 표현에 영지주의적 색채가 짙게 배어있다. 영지주의는 더 많은 지식과 앎을 통해 누구보다 더 깊이 참된 진리를 얻어내려는 경쟁적 사상을 내포한다. 우리의 편지는 이러한 태도를 ‘사탄의’라는 수식어로 규정해 버린다. 하느님의 깊은 진리는 인격적 관계에 따른 타자에 대한 배려와 환대를 기본으로 한다. 저만의 노력이나 열정으로 타자를, 나아가 하느님을 알아내겠(었)다고 덤벼드는 일은 사탄의 일이다. 티아티라에게 남겨진 하나의 일은 어쩌면 하느님이 누구이신가 라는 질문 그 자체가 아닐까. 사탄의 깊은 비밀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의 깊은 신비는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 11,33) 하느님의 깊은 신비는 여전히 두려운 질문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에페 3,18)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순간, 그 모든 신앙은 실패한다.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한과 샛별을 받는 일은 다름 아닌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묵시 2,26-27; 22,16) 예수님과 하나 되는 일은 끊임없는 타자에 대한 질문으로 가능한 것이지, 자신이 정답이라 생각하는 순간, 질문은 강요가 되어 타자를 죽이고 하느님을 업신여기게 된다. 하느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용히, 겸허히 다시 한번 묻게 된다. “당신은 누구이신지요?”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페르가몬에 보내진 편지(묵시 2,12-17)

페르가몬은 소아시아 북쪽에 위치하고 아주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도시다. 여러 신들을 위한 신전이 있었고, 로마의 지배를 받기 전 아탈로스 1세(아탈로스 왕조) 임금의 승리를 기념하는 여러 조각들이 산재해 있었다. 물론 소아시아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지배를 받은 이후로 황제들을 위한 예배 역시 성행했던 곳이다. 그래서일까. 페르가몬에 보내진 편지는 페르가몬을 ‘사탄의 왕좌’(묵시 2,13)라고 단정해 버린다. 자비, 평화,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 다소 잔잔하고 부드러운 뉘앙스를 지녀야 할 것 같은 성경의 문장들 틈에서 사탄의 왕좌라고 도시 전체를 규정하는 건, 아무래도 성급하거나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차갑고 거북한 성경의 문장들은 그래서 외면받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구약의 아모스서인데, 단죄와 심판, 그리고 질책이 가득한 문장으로 엮어진 아모스서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교회 안에서 본격적으로 읽혀진다. 끔찍한 세계대전을 전후로 아모스서의 날카로운 경고성 문장들은 세상에 부득불 필요한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인간들은 끝내 무너지고 넘어져야 제 과오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지 아쉬울 따름이다. 페르가몬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분은 ‘쌍날칼’(묵시 2,12)을 지니신 사람의 아들이다. 날카로운 쌍날칼은 요한묵시록에서 그리스도의 복수를 가리키는 표징이다. 요한묵시록 19장에서 백마 탄 기사로 묘사되는 그리스도는 그야말로 장군이요, 승리자다. ‘하느님의 말씀’(묵시 19,13)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리스도는 날카로운 칼을 입으로 뿜어내며 ‘임금들의 임금, 주님들의 주님’(묵시 19,16)으로 등장한다. 그리스도의 복수는 대립할 경쟁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권능을 지닌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쌍날칼을 지닌 사람의 아들이 계신다면, 그곳이 사탄의 왕좌 또는 다른 무엇이 있든, 주눅 들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를 주님이요 임금으로 고백하는 신앙인에게 세상의 모든 곳은 주님을 증거하는 자리일 뿐이다. 페르가몬에는 안티파스(묵시 2,13)라는 증거자가 있었다. 안티파스에 관한 기록은 5세기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에 의해 처음 나타난다. 도미시아누스 황제 통치 시절(81~96년) 페르가몬의 주교로, 우상숭배를 거부하다가 불에 달구어진 청동황소상 안에서 죽어간 순교자가 안티파스라고 전해진다. 페르가몬에 보내진 편지는 안티파스의 순교를 보고서도 신앙공동체는 물러서지 않았고 제 믿음을 지켰다고 말한다. 쌍날칼을 지닌 사람의 아들을 믿는다는 건, 제 신념과 정체성이 세상의 어떤 논리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결심과 실천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페르가몬에 보내진 편지를 읽는다는 건, 교회와 세상, 혹은 믿음과 불신의 대립 구도에 의한 이원론적 해석과는 거리가 있다. 마침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나 너에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묵시 2,14) 세상도 아니고 불신도 아닌, 신앙을 끝끝내 지키고 살아가고 있다고 이미 인정한 ‘너’(페르가몬교회)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는 사람의 아들의 말씀이 당혹스럽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이유가 드러난다. “너에게는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이 있다.”(묵시 2,14) 다른 이방 종교나 문화, 혹은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믿는 이들 내부에 믿음의 가치와 무관하거나 해로운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발라암은 구약의 예언자다. 그는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모압 임금 발락의 청에 맞서 이스라엘을 축복해준 예언자였다.(민수기 22-24장 참조) 그러나 발라암이 축복한 이스라엘은 ‘프오로’에서 모압 여자들과 즐겼고 우상숭배를 자행했다.(민수 25,1-3) 하느님과의 계약을 모조리 거부한 이스라엘이었다.(신명 31,16) 발라암의 축복과 이스라엘의 일탈은 함께 갈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삶의 행태가 어떠하든 하느님의 백성이란 이유로 무작정 축복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초대교회는 발라암의 이야기를 통해 곧은 정체성을 지니지 않는 신앙의 ‘적당한 타협’이나 ‘무한 긍정’, 혹은 ‘원칙 없는 관대함‘에 대해 걱정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우상과 황제숭배의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적당한 개방과 환대의 수준에서 처리해버리는 일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고 또한 다짐하면서 말이다.(1베드 4,2-4) 세상의 위협이나 박해 앞에 신앙은 피아식별이 쉬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명확히 구별해 낸다. 그러나 교회 내부의 문제에 눈을 돌리면 그 식별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세심한 관찰 없이는 교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신앙의 왜곡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신앙이 ‘인자함’이나 ‘중용’의 미덕으로만 꾸며질 때 그렇다. 신앙인은 착하고 부드럽고 온유해야 한다고 말하는 근거로 ‘사랑의 예수님’을 찾지만, 세속과 타협하고 정의에 맞지 않는 일이 교회 내부나 외부에서 일어날 때, ‘쌍날칼의 예수님’을 외면하는 것이 신앙이 되어선 안 된다.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 건, 비겁한 타협이 될 수 있고, 말해야 할 바조차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하면서 사랑, 정의, 평화를 거론하는 건 허망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살이라는 게 실은 비겁한 타협이 연속일 때가 많고, 그것으로 우리는 후회와 성찰을 연거푸 살아내는지 모를 일이다. 결국 페르가몬은, 아니 우리 믿는 이는 회개해야 한다.(묵시 2,16) 숨겨진 만나를 먹고 흰 돌도 찾아 ‘새 이름’을 얻어야 한다. 탈출기에 나타나는 ‘만나’를 두고 랍비 엘리아자르는 이렇게 해석한다. “이 세상에서 너희들은 만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가올 세상에서 너희들은 만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만나를 ‘숨겨진 만나’로 칭하면서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성찬례로 이해했다. ‘숨겨진’이란 그리스말 형용사를 ‘간직한’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특별히 유보된 만나는 다름 아닌 예수님 그분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회개는 예수님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것이다. ‘쌍날칼’의 예수님을 향하는 건 이러저러한 세상 논리에 휩쓸린 교회가 되지 않길, 그래서 할 말은 하는 교회이길, 행여 교회 조직의 견고함을 위하여 정치인과 경제인 앞에 적당히 타협하고 할 말을 잃(잊)어 가는 교회가 되지 않길 외치고 다짐하는 일이기도 하겠다. 그리하여 승리를 상징하는 흰 돌을 세상 마지막까지 간직하는 교회이면 좋겠다. 세상 속 홀로 신앙을 외치는 동시에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교회, 어렵고 무거운 일이다. 우리는 그 힘든 일, 무거운 일을 해내고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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