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이탈리아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1347~1380)는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끊임없이 외쳤지만, 항상 개인은 먼저 내면을 성찰해야 한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위기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자기 비움과 내면의 정화를 통해 교회와 사회를 바로 세우려 했던 이의 고백은 여전히 계속되고, 성녀의 내적 자세는 여전히 우리 마음에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지난 몇 년 그리고 그 끝자락에서 우리는 어둠의 문턱을 함께 넘어왔다. 정의가 무너지고 공동체의 숨결마저 메말라가던 때, 많은 이가 침묵과 인내로 그 시간을 견뎌 이제 다시 역사의 한 장을 이룰 자리에 다다랐다.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좌절 대신 성찰을 택했고, 분노보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이를 ‘문턱’을 뜻하는 라틴어 ‘līmen’에서 유래된 ‘리미널리티(liminality)’로 정리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글라스고 출신의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 1920~1983)는 이를 “통과의례에서 나타나는 중간단계, 곧 이전의 질서는 무너졌지만, 새로운 질서로는 아직 진입하지 못한 과도기적 상태”라고 정의한다. 이 전환기에는 사회적 정체성과 질서가 잠시 정지되고, 사람들은 혼돈 속에서 침묵을 넘어 변화의 시간을 통과하게 된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리미널리티 상태에서 무엇이 정의이고 진실인지에 대한 뼈저린 통찰을 통해 여기에 도달했다. 익명성 안에서 진실을 외치기 위해 영하의 추위를 견딘 용기, 광풍같이 몰아치는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은 양심, 사사로운 이익보다 국가를 위해 정의를 택했던 수많은 이가 바로 함께 문지방을 넘어선 이들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묻는다. 무너진 나라 살림, 종식되지 않은 내란, 임계점을 넘어선 기후변화라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 나라를 이끌 대통령은 누구여야 하는가? 그는 단순한 권력의 수혜자가 아니라, 이 통과의례를 함께 견뎌온 국가 공동체의 동반자여야 한다. 권력이 아니라 책임으로, 지배가 아니라 섬김으로 나아갈 줄 아는 이여야만 한다.
신앙의 지침, 삶의 지침을 몸소 보여주시고 선종하신 교종 프란치스코(1936~2025)는 “더 나은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하며, 사랑으로 사람을 중심에 두는 ‘정치적 애덕’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180항 참조) 이 말은 대통령이 단지 행정의 수반이 아닌 국민의 상처를 보듬고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해야 할 사명의 자리, 곧 공동체 전체의 존엄과 일치를 위해 스스로를 내어놓는 사랑의 자리임을 일깨운다.
그 자리는 정치적 셈법을 따지는 계산대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의 눈물과 목소리를 듣고 응답해야 하는 윤리적 감수성을 지닌 책임의 중심지이며,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동반자로서의 사명 또한 품어야 하는 자리다. 회복의 정치는 분열이 아닌 연대의 언어를 사용하고, 정의로운 기억을 바탕으로 용서와 화해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대통령은 ‘정의의 검’이 아니라 ‘정의의 저울’을 들 줄 알아야 한다. 국민은 더 많은 공약을 원하지 않는다. 더 깊은 책임, 더 단단한 도덕성, 더 낮은 자세를 원한다. 먼저 낮아지고 먼저 회심할 줄 아는 지도자만이 공동체를 이끌 자격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시대의 변화를 지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인간다움을 본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필리 2,6-7)신 분이시다. 새로운 대통령 역시 통치의 자리가 아닌 섬김의 자세로 있기를 바란다. 기다린다, 우리는. 어둠의 문턱을 넘어선 이들이 더 이상 뒷걸음치지 않도록, 그 곁을 함께 걸을 대통령이 이 나라를 온전히 껴안는 사람으로 나타나기를.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