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셀 수 없는 군중(묵시 7,9-17)

십사만 사천의 군중에 이어 셀 수 없는 군중이 등장한다. 십사만 사천을 유다계 그리스도인이라 해석하고, 셀 수 없는 군중을 이방인계 그리스도인들이라 해석한다. 하느님 백성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셀 수 없는 군중에 대한 서술을 시작으로 모든 백성에게 열려 있는 것이라고 대부분의 주석학자들은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이들이 셀 수 없는 군중이라고 요한묵시록 스스로 규정하고 있다.(7,9) 구원은 이제 모든 이를 향한다.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도 셀 수 없는 군중과 닮은 서사가 나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22,17) 구원은 애시당초 모든 이를 향해 있었다. 다만 모든 이를 위한 보편적 구원이 특별한 민족, 특별한 인간들에 의해 규정되면서 사달이 났다. 바빌론 유배(기원전 597~538년) 이후, 이른바 ‘유다이즘’을 형성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에 배타적인 사상을 더욱 공고히 가져갔고 저들만이 하느님의 구원에 합당한 민족이라 여겼다. 요한묵시록의 셀 수 없는 군중은 이런 배타적 민족주의를 여지없이 허물어뜨린다. 수를 세어 구원에 합당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은 지금도 폐쇄적인 사이비 종교나 배타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교회들 안에서 심심찮게 등장한다. 셀 수 없는 군중이 머무는 곳은 어좌와 어린양 앞이다. 요한묵시록 4~5장에서도 살펴봤듯, 어좌라는 곳은 천상에 유폐된 공간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함께 모여 온 곳이다. 어린양은 세상 모든 민족들을 모아 ‘사제의 나라’로 만들었다.(묵시 5,10) 요한묵시록 7장의 셀 수 없는 군중은 마치 사제처럼 어좌 앞에 서서 구원의 완성을 노래한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묵시 7,10) 요한묵시록 21~22장의 새 예루살렘에서도 같은 장면이 나온다. 세상 모든 민족이 모여오는 새 예루살렘에서 어좌에 앉아계신 하느님과 어린양은 경배와 흠숭의 대상이 된다. 셀 수 없는 군중은 구원의 영광과 기쁨을 가리키는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있다. 승리하는 이들이 드는 야자나무 가지 또한 들고 있다. 초대교회는 야자나무 가지를 순교의 승리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이해했다. 세상의 폭력 앞에 신앙은 무력하지만 끝끝내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승리한 것이라 초대교회는 이해했다. 야자나무는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초막절 예식에 사용된 것이기도 하다.(레위 23,40 이하)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을 향하는 구원의 길에 야자나무로 엮은 초막은 수없이 세워지고 옮겨지고 또다시 세워졌다. 수난 동참하는 것이 환난이고 증거의 삶 살아가는 것이 구원 환난과 구원 분리하지 말아야 야자나무는 구원의 길의 고단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 갈망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복지를 향한 희망과 설렘의 상징이기도 했다. 요한묵시록 7장 15절은 초막절의 분위기를 더욱 뚜렷하게 묘사한다. 셀 수 없는 군중은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어좌에 계신 분은 셀 수 없는 군중을 위한 천막이 되어주신다는 것. 그러므로 요한묵시록 7장의 셀 수 없는 군중이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 구원을 노래하는 것은 이집트 탈출로 선명히 새겨진 구원이 모든 민족, 모든 시대를 향해 온전히 실현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구원은 보편적이며 현재형이다. 셀 수 없는 군중이 외치는 구원은 시편 118편 25절의 ‘호산나’(הוֹשִׁ֘יעָ֥ה נָּ֑א)를 닮았다. ‘구원을 주소서’라는 뜻의 ‘호산나’는 정확히 하느님과 어린양을 향한다. 구원의 주체이신 하느님을 향한 이 외침은 초막절에 야자나무 가지를 흔드는 순간 울려 퍼진 것이기도 하다. 호산나와 더불어 요한묵시록 5장 12절에 나타났던 찬미가가 셀 수 없는 군중을 통해 다시 등장한다.(묵시 7,12) 어좌, 스물넷 원로, 네 생물 모두가 셀 수 없는 군중과 더불어 하느님을 찬미한다. 온 우주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구원을 노래한다. 모든 이를 향한 보편적 구원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13절부터는 셀 수 없는 군중의 신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원로가 묻는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요한은 답하지 못했고 원로가 부득불 답을 한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마지막 날, 종말의 시간에 고통과 박해, 수난이 닥친다는 생각은 묵시문학의 전통적인 생각이다. 구원을 노래하는 군중이 환난을 반드시 겪어내어야 한다는 전통적 믿음은 다니엘서 12장 1절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우리의 요한묵시록은 환난과 구원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말 번역은 셀 수 없는 군중을 환난을 ‘겪어 낸’ 이들로 이해하는데, 그리스말 본문은 환난을 ‘겪고 있는’(그러니까, ‘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현재 분사형인 ‘에르코메노이’(ἐρχόμενοι)가 사용되었다) 이들로 소개한다. 환난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일이라서 끝난 게 아니다. 환난을 여전히 겪고 있는 이들이 구원을 노래한다. 그러나 환난을 부정적인 고통 자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어서 나타나는 구절에서 환난은 어린양의 피에 겉옷을 빨아 희게 만드는 일로 소개된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 환난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환난은 그러므로 지속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수난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구원이 또렷이 드러난다. 모든 이를 향한 구원을 노래하는 일은 이제 우리 삶의 자리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한다. 우리 삶이 예수의 삶과 닮았는가,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 길이 되는가, 그리하여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이 힘겨워도 행복한 삶이라 우리는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반성들이 구원을 이해하는 첫 번째 작업이어야 한다. 모든 이가 구원을 받을 만하지만, 모든 이가 십자가를 지는 데 덤벼들지는 않는다. 모든 이가 누릴 구원은 예수님의 증거의 삶이 지금 여기서 여전히 진행되어야 이루어진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를 내려놓게 해달라 기도하는 우리에게 과연 구원은 가능한 것인가. 우린 무엇을 증거하고 무엇에 승리하고 있는가.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말씀묵상] 부활 제6주일, 청소년 주일

오늘 복음(요한 14,23)에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 사랑을 율법으로 규정한 신명기 6장 5절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 아래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받은 율법 가운데 으뜸입니다(마태 22,36-38 참조). 그만큼 하느님 사랑은 우리에게 익숙한 율법이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서 지키고 있는지 가늠하기는 어려운 규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레위기 19장 17절에는 이와 반대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미운 감정을 다스리려 노력하듯 사랑도 함양해갈 수 있다는 뜻이겠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과연 어떻게 정의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유다인들은 구약의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 애씁니다. 안식일이 되면, 무거운 짐을 들지 말라는 규정(예레 17,22)을 지키려고 비가 와도 우산도 쓰지 않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기원전 6세기에 시나이산 계약을 어긴 죗값으로 망국의 비극을 겪었기에, 그런 재앙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율법을 더 엄격하게 지키려 노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보면 하느님 사랑이 실천해야 하는 행동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영적 의미를 높게 보는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이런 유다인들의 행동이 몸에 밴 습관처럼 비치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을 율법으로 제정한 고대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아무래도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인 의미가 원 뜻에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해석에는 고대 근동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이 도움을 줍니다. ▶ 파라오에 대한 사랑: 옛 이집트에 자리했던 ‘아마르나’라는 성읍의 유적부터 보겠습니다. 아마르나는 한때 이집트를 뒤흔든 종교 혁명의 중심지로서, 고대 이집트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신을 섬긴 파라오의 수도였습니다. 옛 이집트의 종교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다양한 동물 형상을 한 신들을 섬겼지만, 기원전 14세기 파라오 아케나톤은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며 수도를 아마르나로 옮겼습니다. 이런 행보가 기존 종교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기에 아마르나 시대는 짧을 수밖에 없었지만, 아마르나는 이후 성경 학계에서 중요한 장소가 됩니다. 왜냐하면 옛 가나안과 이집트를 오간 서신이 이곳에서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서신은 ‘아마르나 편지’라 일컬어지는데, 옛 가나안과 이집트의 상황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이에 따르면 가나안은 이집트의 지배를 받는 소규모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예루살렘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이 서간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파라오에 대한 사랑입니다. 가나안의 봉신 국가들은 파라오를 ‘사랑’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우리 기준으로는 파라오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네들에게 사랑은 정치적 의미로서 ‘충성’을 뜻하였습니다. ▶ 아시리아 주군에 대한 사랑: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의 임금 에사르 하똔과 관련된 기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에사르 하똔이 봉신 국가들에 황태자인 아슈르바니팔을 ‘사랑’하라고 명하는데요, 이 역시 파라오에 대한 사랑과 맥을 같이합니다. 말하자면 고대 근동인들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차원을 넘어선, 계약의 맥락에서도 쓰인 일종의 관용어였던 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성경에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피력하거나 요구하는 구절이 신명기 6장 5절 외에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에 대해 위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면, 이는 ‘누구든 예수님께 충성하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요한 21장 15절에서 19절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래아 바닷가에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 베드로에게 수위권(首位權)을 재확인하신 상황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어보신 의도가 좀 더 구체적으로 가늠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에 대한 베드로의 마음이 애틋한지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신의를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하신 매우 실제적인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십사만 사천(묵시 7,1-8)

요한묵시록 6장까지 여섯 개의 봉인이 연거푸 열리다가 7장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른다. 일곱 번째 봉인은 8장부터 다시 이어진다. 7장은 6장의 마지막, 그러니까 어린양의 진노를 견뎌 낼 수 있는 이를 찾아 나서는 질문에 이어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 사람들은 어린양을 진노의 주체로 읽어내었고 이 세상은 그러므로 산과 바위 뒤에 숨어야만 하는 절망의 자리가 된 듯하여 허망하다. 그러나 이것이 끝인가? 요한묵시록 7장은 세상 사람들의 절망적 읽기에 또 다른 대답은 내놓는다. 7장은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후기 유다이즘은 천사들이 종말론적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주인공으로 이해한다.(에녹 60,11; 희년서 2,2) 요한묵시록 역시 천사가 불의 권한을 지녔거나(묵시 14,18) 물을 주관하는 것으로 소개한다.(묵시 16,5) 7장의 천사는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고 있다. 즈카르야서 6장 5절에서 영향을 받은 이 장면은 징벌의 시간 바로 전, 하나의 ‘멈춤’, 혹은 ‘쉼’을 상정한다. 하느님의 종 이마에 받은 인장, 주님 구원 뜻하는 명징한 은유 구원, 노력해서 얻을 수 없는 무한·보편으로 주어지는 선물 왜 멈추는가. 후기 유다이즘의 사상, 예컨대 노아의 홍수를 재해석하는 에녹서의 생각에서 얼마간의 답을 얻을 수 있다. 징벌을 준비하는 천사들이 있었다. 홍수를 쏟아부을 수 있는 천사들이었고,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야만 했다. 이에 주님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 수 있도록 천사들을 잠시 멈추게 한다.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찰지라도 주님은 구원에 대한 얼마간의 시간과 방도를 마련하신다는 이야기다.(에녹 6) 다시 요한묵시록으로 돌아오자면 7장에 등장한 천사들은 분명 징벌을 준비하고 있는 천사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바람을 붙들고 멈춤과 쉼을 이끌어내는 천사들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얼마간 간직하게 한다. 징벌이 잠시 멈추는 곳에서 기어이 희망을 찾아내어야 한다. 이야기는 구원을 향해 급하게 전환된다. 2절에 다른 한 천사가 ‘해 돋는 쪽’에서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올라온다. ‘해 돋는 쪽’은 구원을 상징한다. 에덴동산이 동쪽이었고(창세 2,8), 주님의 구원을 알리는 키루스 임금이 동쪽에서 왔고(이사 41,2) 하느님의 영광이 해 뜨는 동쪽에서부터 나타났다고 구약은 말한다.(에제 43,2) 하느님의 인장 역시 구원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인장은 징벌의 시간에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찍혀야 한다. 징벌이 잠시 멈춘 시간, 우리는 하느님의 종들을 보살피시고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발견한다. 하느님의 종들은 하느님께 온전히 속해 있어 종말을 맞닥뜨린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로 소개되는 ‘하느님의 종들’을 두고 유다계 그리스도인이라 해석하곤 한다. 열두 부족에서 시작한 십사만 사천이라 유다 전통과 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종들의 신원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은 특정 민족이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킬 때, 하느님의 종이라는 호칭은 요한묵시록에 자주 등장한다.(1,1; 2,20; 6,11; 19,2.5; 22,3) 말하자면 ‘땅의 자리’에서 속량되어 하느님에게로 온전히 의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표현이 ‘하느님의 종’이라는 것이다.(묵시 14,3) 하느님의 종들이 이마에 받은 인장은 또 무엇일까. 에제키엘서 9장 4절은 예루살렘에 징벌을 내리기 전에 구원받을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도록 주님께서 배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에제키엘서 9장 4절에서 ’표’라고 번역된 히브리말 ‘타우’(תָּו)를 두고 십자가의 예형으로 인식하여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되었다는 그리스도교적 해석이 있었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묵시록 7장에서 인장을 받은 하느님의 종들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라고 읽어내는 해석과 맞닿아 있다. ‘인장’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그 말마디를 두고 그리스도교의 세례와 연결하기도 한다. ‘인장’이라는 그리스말은 ‘스프라기스’(σφραγίς)로 세례와 같은 의미로 초대교회는 이해했기 때문이다.(2코린 1,21 이하) 어떤 해석이든 인장을 받았다는 것은 징벌의 순간에도 하느님의 보호는 분명히 살아 있다는 명징한 은유가 된다. 하느님의 종들의 숫자는 십사만 사천이다. 각 지파마다 일만 이천씩 나와서 총합이 십사만 사천이다. ‘12’는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고, ‘1000’은 풍성함, 충만함, 완벽함을 가리킨다. 하여 ‘1만2000’은 하느님 백성이 가득하고 완전하다는 뜻을 품는다. 여기에 다시 ‘12’를 곱해야 십사만 사천이 된다. 같은 수를 다시 곱하는 것은 묵시문학적으로 ‘마땅하고, 당연하여, 절대적으로 그러하다’는 의미다. 결국 십사만 사천은 하느님 백성이 진정으로 가득하고 완전하고 풍성하다는 수적 가치를 지닌다. 요한묵시록 7장 9절은 그리하여 십사만 사천의 무리를 ‘셀 수 없는 무리’라 규정하고야 만다.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실은 무한대의 사람이다. 요한묵시록이 숫자에 민감하여 여러 숫자들을 소개하고 제시하는데 대략적으로 보면 하느님과 어린양 쪽의 서술에서는 무한적이고 보편적인 숫자를, 악과 그의 부속 형상들, 예컨대 용과 두 짐승과 대탕녀 쪽의 서술에서는 한계지워지고 제한적인 숫자를 배치시킨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구원은 보편적이고 무한하나 악의 자리와 그 힘은 제한적이어서 무력하고 무능한 것이다. 요한묵시록 7장은 잠시 쉬어가는 대목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리기 전, 우리는 ‘구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구원은 십사만 사천, 그러니까 무한하고 보편적인 자리다. 구원은 특정 목적에 부합하는, 혹은 부합하고자 애쓰는 이의 특별한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그러니까 무한하신 하느님을 닮았다. 우리가 넓어질수록 구원은 뚜렷해진다. 우리가 좁고 좁아서 다른 이와 다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수록 구원은 그만큼 좁아지고 어려운 것이 된다. 구원은… 그러니까 주어진 선물이지 갖고 싶은 선물이 아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3면

[말씀묵상] 부활 제5주일

오늘 복음은 “유다가 나간 뒤에”라는, 때를 알리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 앞의 장면은 성목요일 저녁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뒤,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시는 긴장감이 도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적셔 유다에게 주시어 제자들이 나중에 깨달을 수 있도록 배신자를 미리 지목하셨고, 심지어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라고 말씀하시어 적어도 유다에게는 당신이 알고 계심을 명확히 알리십니다. 유다는 이미 마음에 사탄을 품었기에 그 말씀에도 회개하지 않고 배반의 길로 나갑니다. 그의 마음속의 어둠을 요한 복음사가는 “때는 밤이었다”라고 표현합니다.(요한 13,21-30 참조) 이 밤은 배신의 밤이자 예수님께는 수난과 죽음이 시작되는 고통의 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요한 13,31)라고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3,32)라고 덧붙이십니다. 즉, 사람의 아들은 두 번 영광스럽게 되십니다. ‘이제 곧’, 즉 머지않은 미래에 영광스럽게 되신다는 것은 당신의 부활을 가리키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유다가 나간, 또는 유다를 보내신 ‘이제’라는 시점에 이미 이루어진, 또는 이미 시작된 영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선택하신 당신의 수난과 죽음입니다. 고통의 신비와 영광의 신비를 나누어 생각한다면 이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들어 올려짐’으로 여러 번 표현되는데(요한 3,14. 8,28. 12,32), 이는 죽음의 형벌이기도 하지만 영광스러운 표징이기도 합니다. 구리 뱀을 본 사람이 모두 살아났듯이 그분을 믿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죽음을 택하셨지만, 그것은 그분이 아드님이시며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보여주는 징표가 됩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목숨을 내어주는 참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기에, 또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 영광에 초대하십니다. 그분의 뒤를 따르기 위한 새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면서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사람을 사랑하여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사랑하셨듯이 목숨을 바치는 참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면서 예수님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참조)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희생을 통해서 당신이 아버지 안에 머물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머무시는 일치를 완성하셨듯이, 제자들이 당신과 같이 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요한 14,3-11 참조). 그리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 당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당신 안에 머무르는 것이 모두 같은 것이고, 그렇게 하면 그들이 당신의 친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4,20-21. 15,1-17 참조). 이것이 제자들의 영광이요 그들의 구원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잘 알아들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기다렸지만 계속되는 박해와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교회가 겪는 고난이 곧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오늘날 어떤 이는 교회가 기다리고 있는 세상 구원이 이천 년이 지난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 정도면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이천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이가 주님의 사랑을 살고 전했으며, 이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 구원은 늘 이 세상에 넘쳐흘렀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고, 그분이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묵시 21, 3-5 참조)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2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마술사 시몬

1980년대 중반 이스라엘의 마술사 유리 겔라는 우리나라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는 방송에서 염력이나 텔레파시를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TV 앞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앉아 숟가락을 들고 함께 구부리려 그의 말에 집중하는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유리 겔라는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뿐 만 아니라, 고장 난 시계 고치거나 손가락으로 사람을 들어올리는 등의 시연도 선보였다. 외국에서 마술사라는 말에는 ‘아티스트’란 의미가 있다. 마술사란 기묘한 현상처럼 보이는 속임수나 환상을 자연적인 방법으로 연출해 관객을 즐겁게 하는 일종의 공연 예술가란 의미다. 대부분의 마술은 마술사의 행동에 주의를 끌게 해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에 집중시켜 눈속임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마술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는데 마술사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마술사들이 악마를 위한 의식을 행하는 자로 여겨져 탄압을 받기도 했다. 신약성경에도 사마리아 지역의 마술사 시몬이란 사람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마술사가 미래를 예언하고 병을 낫게 하거나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사마리아 지역은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아 다른 이방 지역처럼 주술적 믿음이나 마술 등 이교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만연했고 잡신들의 기운이 강해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렸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무언가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미래의 운세를 알기 위해 점쟁이를 찾는 경우가 많다. 구약성경에도 예언자들은 이방인의 마술 행위를 끊임없이 고발한다. 마술 행위는 결국 유다인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해를 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에 내려온 필립보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기적을 행하자 많은 이가 세례를 받게 됐다. 마술사 시몬도 필립보를 찾아가 그의 말과 기적 행위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자신은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이 필립보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필립보에게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됐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필립보처럼 기적을 행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여러모로 부족함이 있었다. 얼마 후 사마리아 지방에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도록 기도했다. 사도들이 오순절 날의 체험처럼 , 불길처럼 성령을 내려보내자 치유와 예언 등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시몬은 갑자기 돈을 챙겨 사도 베드로에게 가서 사도들처럼 기적을 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느님의 성령을 돈을 주고 사려했던 마술사 시몬에게 베드로는 따끔하게 충고한다. 신앙을 갖는 동기는 여러 가지이다. 한 선배 사제는 공소에 오시는 신부님이 김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마음이 동해 신학교에 왔다고 했다. 우리가 계속해서 회개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하며 뉘우친다면 진정한 신앙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2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리다(묵시 6,12-17)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묵시문학의 전형적 장면들이 등장한다. 큰 지진과 천체의 혼돈이 그러하다. 대개 이단들은 이러한 혼돈을 신의 심판이나 징벌로 이해하곤 한다. 더욱이 어느 나라의 지진이나 해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현실의 사건들을 묵시록의 혼돈과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세상 종말의 문학적 수사를 실제 사건과 엮어내어 해석하는 일은 끔찍하다. 누군가의 희생을 빌미 삼아 묵시문학적 표현에 대한 설익은 해석을 내놓는 일은 폭력 그 자체다. 땅의 지진과 같은 묵시문학적 표현들은 구약성경 안에서도 발견된다.(아모 8,8; 9,5; 요엘 2,10) 후기 유다이즘, 그러니까 기원후 1~2세기의 묵시문학 작품들 안에서도 지진에 대한 서술은 흔하다.(2바룩 70,8) 태양이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것도 묵시문학의 전형적 은유다.(이사 50,3; 요엘 3,4) 당시 사람들은 끔찍한 사건이나 자연재해를 종말의 상징으로 해석했고, 그 재해가 두려울수록 하느님을 향한 간절한 외침은 뚜렷했다. 이를테면, 묵시문학의 재앙적 서술은 암울한 현실 안에 위엄하신 하느님이 직접 개입하신다는 신앙을 내포한다. 공포스러운 장면은 실은 하느님을 향한 한 줄기 희망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하늘이 두루마리 말리듯 사라져 버리고 산과 섬 또한 제자리를 잃어버리는 장면 역시 묵시문학적 표현이다.(느헤 1,5; 예레 4,24) 묵시문학이 서술하는 천체의 혼돈이 마지막 시대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을 암시하는 것이라면, 하늘이 사라지고 땅 위의 것들이 제자리를 잃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어야 한다. 물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국한된 관점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개입을 못마땅해하는 이들이나, 하느님의 개입이 인간 세상이 원하는 행복, 기쁨, 성공 등의 장면들로 묘사되길 원하는 이들에겐 천체의 혼돈은 불편하다. 만약 우리가 진정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라면,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는 장면에선 설레야 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세상은 온통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창세기 1장 6절에 하느님은 물을 갈라놓아 우주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창공을 만드시는데, 창공이라고 번역된 ‘라키아’(רָקִיעַ)는 ‘펼쳐진 공간’이라는 뜻을 가진다. 두루마리 펼치듯 생겨난 것이 창공, 곧 하늘이다. 프랑스 리옹의 성서신학자 프랑수아 마르탱은, 하늘이 두루마리 말리듯 사라져 버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두루마리 펼치듯 창공을 만드시기 이전, 그러니까 창조 이전의 시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묵시문학의 재앙적 은유들은 이 세상을 접고 새로운 세상을 펼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재창조를 암시한다는 해석이다. 이런 해석은 주류의 해석이 아니지만, 적어도 세상 종말을 끔찍한 사건들로 도배하는 묵시문학 작품들의 의도에는 부합하는 듯하다. 끔찍한 사건 앞에 주눅 들어 죄의식과 자책에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미래를 설계하고 기꺼이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섬세하게 다듬기를 바라는 의도 말이다. 요한묵시록의 서사 흐름이 천체의 혼돈 이후 7장에서 십사만사천의 구원받은 이들을 소개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천체의 혼돈은 하느님 안에 구원을 누리는 이들의 등장을 위한 사전 작업인 셈이다. 그러나 세상은 재창조를 원하지 않는다. 요한묵시록 6장 15절에 일곱 개로 분화된 사회 계층이 등장한다. 당시의 인간 사회를 총망라하는 계층 분화의 관습적 예를 보여준다. 땅의 임금, 고관, 장수, 부자, 권력가, 종, 그리고 자유인…. 힘과 재능, 그리고 노력과 우연이 뒤섞여 우리 사회는 다양한 계층으로 형성된다. 이른바 기득권은 그 계층 구조 덕에 누리는 이익이 있어 세상의 변화를 싫어한다. 그러나 경쟁에 뒤처져 기득권으로부터 멀어진 부류는 세상의 계층을 차별과 소외로 인식하며 변화를 갈망한다. 15절과 16절은 신분과 권력, 그리고 노력 여하에 따라 형성되는 계층 분화의 세상을 한꺼번에 없앤다. 모든 계층은 산과 바위를 향해 숨겨달라고 아우성이다. 호세아서 10장 8절의 영향을 받은 이 아우성은 하느님께 불충한 이들이 겪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다. 징벌을 감당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서 다만 숨기를 바라는 나약함의 아우성이다. 창세기 3장 8절의 아담과 하와도 그랬다. 하느님이 찾는대도 아담과 하와는 숨었다. 하느님처럼 되고자 열매 하나를 나눠 먹은 결과는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하는 인간의 처지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그리하여 하느님을 제대로 반기지 못하는 인간의 현실은 무언가 답답하고 서글프다. 본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고 돌보는 ‘관계적’ 존재로 지어졌는데, 인간은 숨어있다. 인간은 그러므로 인간답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인간에게 하느님은 ‘진노’(嗔怒)의 주체일 뿐이다.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는데,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 ‘주님의 진노의 날’은 마지막 때에 등장하시는 하느님의 위엄을 가리키는 전통적인 예언의 말마디다.(요엘 2,11; 말라 3,2) 요한묵시록은 진노의 자리에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언급한다. 앞서 요한묵시록 5장에서 어린양은 세상 모든 사람을 속량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했다. 세상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그분과의 인연을 다시 엮어 놓아 이른바 구원이란 걸 이루신 예수님을 ‘진노’의 주체로 해석하는 인간들의 아우성은 그리 달갑지 않다. ‘주님의 진노의 날’이 마지막 시대를 가리키는 시간적 은유라면, 그 마지막 시간에 우리는 주님을 어떤 모습으로 형용하고 은유할 것인가. 그 누구도 견디어 낼 수 없는 진노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당당히 반길 기쁨의 주체로 주님을 만나길 다만 바랄 뿐이다. 인간들의 아우성 이후에 요한묵시록 7장은 구원을 노래하는 십사만사천을 등장시킨다. 참 다행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9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원한 악녀 헤로디아

중국사에는 3대 악녀(惡女)가 있다. 바로 한나라의 여태후(呂太后)와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청나라의 서태후(西太后)이다. 이들은 높은 권력을 쥐락펴락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고 나라의 근간을 크게 흔들었다. 한나라의 초대 황제,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는 유방의 소실, 척부인과 그녀의 아들인 유여의와 갈등이 심했다. 자신의 아들, 혜제가 왕위에 오르자 유여의를 독살하였고 척부인은 산 채로 손발을 자르고 눈을 뽑고 약을 먹여서 귀머거리로 만든 다음에 돼지우리에 던져버렸다. 중국사에서 유일한 여황제인 당나라 측천무후는 자신이 황후 자리에 오르는 데 반대한 공신들을 모두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일설에 의하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들과 딸마저 죽였다고 하니 악녀가 맞다. 청나라의 서태후는 3명의 황제가 집권하는 동안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는 아들들이 나이가 어려 수렴청정했는데 아들이 성인이 되어 갈등이 생기자 황제들을 죽였다. 당시 국제 열강의 침략으로 청나라의 국력이 쇠퇴하고 있는 중에도 서태후의 생각은 오로지 자신의 권력 유지였다. 악녀들의 행동은 일종의 사이코패스 성형을 보인다. 다른 이의 고통에 전혀 공감을 못 하며 살인에 대한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신약성경 속에서 헤로디아는 그의 딸과 함께 대표적인 악녀이다. 그는 필립보 임금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시숙 헤로데 안티파스와 결혼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여러 차례 헤로데 왕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왕으로서 법도에 맞지 않다”고 계속 진정했다. 헤로데는 군중들의 여론이 두려워 일단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비판을 받은 헤로디아의 마음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마침 헤로데의 생일 축하를 위한 연회에서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가 춤솜씨를 뽐냈다. 헤로데는 기뻐서 살로메에게 “소원을 말해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했다. 헤로디아는 지체 없이 살로메에게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귀띔했다. 헤로데도 세례자 요한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병사를 보내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게 했다. 잠시 후 경비병은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돌아왔다. 사람들은 피가 흐르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살로메는 쟁반에 담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받아서 헤로디아에게 주었다.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보면서 너무 기뻐했다. 헤로디아와 살로메와 같은 인물은 정말 비정하고 무섭다. 자신을 비난한다고 해서 살인도 주저하지 않는 비정함이 끔찍하다. 인간의 악행은 도대체 어디까지 갈까?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사실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감정이다. 중요한 것은 정말 실행에 옮기는가이다. 인간은 분노와 화를 잘 조절하지 못하면 한순간에 파멸할 수 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하느님을 닮았기에 하느님의 선한 마음, 깊은 지혜, 넓은 아량을 느끼며 감사드릴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꽃보다 더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로 사랑하시기에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과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각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각자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이 다르기에 서로에게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한마음 한 몸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세월의 흐름 가운데 지난날을 돌아볼 때가 있습니다. 자기 삶의 어느 한 순간을 돌아보며 그때 이런 결정을 했더라면, 이렇게 했더라면, 이런 사람을 만났더라면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떠올리게 되는 시 한 편이 있습니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두 갈래 길 중에서 어느 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두 길을 한 번에 다 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함과 미련이 올라옵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이 길을 충실히 걸어가며 감사와 행복을 더욱 느낄 수 있어야겠다는 마음을 담은 시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크고 작은, 중요하고 사소한 수많은 길들 중에 어떤 길을 선택하고 응답하였고, 또 그 길을 충실히 걸어왔습니다. 이런 인생 여정을 살아온 한 분 한 분에게 커다란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서 지금까지보다 더 아름다운 만남과 사건들이 자리하기를 기도합니다. 매일매일 가장 의미 있는 삶을 가꾸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일까요? 그 삶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아닐지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느님의 자녀, 가톨릭신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가 신앙인으로, 가톨릭신자로 부르심을 받아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도록 초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가운데서도 사제직과 수도생활에로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을 생각하는 ‘성소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가장 답하기 어려운 물음들 중 하나는 ‘왜 사제가 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르심을 느꼈고, 또 ‘예’라고 응답할 수 있었는지의 물음입니다. 어느 호젓한 밤 앞날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가운데, 인생살이의 제한된 시간 안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를 고민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고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한 가장 좋은 삶은 ‘사제의 길’이라고 마음속에서 울려왔습니다. 그래서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하고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때의 순수한 마음이 퇴색된 듯 느껴질 땐 부끄러움과 아픔을 느끼며, 조금이나마 더 잘 살아가려고 애쓴다고 여겨질 땐 하느님께 감사와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부르심과 응답의 그 순간을 되새기며 부족하지만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여러 신부님들, 수녀님들, 평신도분들을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이렇게 돌아보다 보면 문득 ‘나는 누군가에게 선물의 존재가 되고 있는가?’하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부르심과 응답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준비하며,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계속 충실하라’고 권고하십니다.(사도 13,43 참조)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8)고 약속하십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사람들’(묵시 7,9 참조)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여야 합니다.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성소의 길을 걷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한 기도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3주일, 생명 주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기 전 티베리아스라고도 불리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만나시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이야기는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제자가 물고기를 잡기에 가장 좋은 때인 밤에 배를 몰고 나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밤새 허탕을 치고 맙니다. 어부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이상합니다.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이윽고 아침이 될 무렵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마치 짙은 어둠이 삼켜버린 것만 같았던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느낌입니다. 부활과 참 잘 어울리는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옛 교우들은 부활 새벽에 산에 올라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하고, 태양이 뜨고 있음을 알리는 수탉은 부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호숫가에 서신 예수님께서 약 100미터쯤 떨어진 배 위의 제자들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는 데 사용하신 ‘얘들아’(παιδία)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합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요한 21,5) 사실 이 단어로 제자들을 부르는 것은 어색합니다. 7세 미만의 어린아이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실까요?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당신을 배신하고 버린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이 괘씸한 죄인이 아니라 마냥 무섭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서 도망쳐 버리고만 가련한 어린아이들로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오른편은 상서로운 방향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153마리나 되는 고기가 잡혔습니다. 오리게네스 교부에 따르면 당시 알려져 있던 물고기 종류가 153가지였다고 하니, 153마리의 물고기는 온 세상 사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첫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루카 5,1-11 참조)과 흡사한 이 장면은 예수께서 비록 제자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떠났어도 그들을 다시 불러 모든 민족을 낚는 어부로 거듭나게 하심을 보여줍니다. 제자는 스승을 버렸으나, 스승은 제자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내 예수님을 알아본 베드로는 옷을 입고 그분께로 헤엄쳐 갑니다.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죄인의 반응입니다.(창세 3,10 참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죄책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의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사명을 부여해 세상으로 파견하기 전 손수 한 끼 식사를 챙겨 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과 생선을 나누어 먹이시는 모습은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사를 세우신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미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신 죽음이니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성체성사 안에서 늘 일치하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질문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는 슬퍼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슬픔은 곧잘 깨달음의 매개체가 되곤 합니다. 베드로도 슬픔을 통하여 세 번 배반한 자신에게 세 번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심으로써 마음을 치유해 주시는 주님의 자비를 깨닫게 됩니다. 특이한 점은, 예수님이 두 번은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질문하시고 마지막 질문에는 ‘필레오’(φιλέω)라는 동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세 번 모두 ‘필레오’라는 동사로 대답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 단어들을 모두 사랑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두 동사가 의미하는 바는 다릅니다. 필레오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 주로 사용되고, 아가파오는 신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아가파오로 물으시는 첫 두 개의 질문에 필레오로 대답한 것은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이 아직 미숙함을 고백하며 그것을 채워 주시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과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필레오로 질문하신 다음 당신 양들을 돌보라 명하십니다. 형제에게 향하는 필레오에 주님께로 향하는 아가파오의 비밀이 숨어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형제를 사랑하면서 하느님 사랑을 배우라는 가르침으로 이해됩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입맞춤으로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

2014년 8월 18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명동대성당에서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마지막으로 로마로 귀국하는 사목방문의 마지막 날이었다. 미사가 끝나기 전 교황님 제의실로 가는 데 경찰 통제선 안쪽에서 한 어머니가 울고 있는 아이와 같이 나에게 손짓했다. 가서 들어보니 어머니가 교황님께 축복을 받으려고 꼭두새벽부터 기다렸는데 입장하실 때 교황님이 다른 쪽을 향해서 인사를 하셔서 안수를 못 받았다고 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 간절해 나는 아이를 데리고 제의실로 가서 기다렸다. 미사가 끝나고 교황님께서 복사단과 함께 들어오셨다. 한여름의 빡빡한 한국 사목방문 4박5일의 일정을 다 마친 교황님은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교황님께 다가갔다. 그러자 교황님은 걸음을 멈추고 지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따듯한 미소를 띠시며 아이와 악수했다. 내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자, 교황님은 아이를 안으시고 볼에 입맞춤하셨다. 아이가 준 편지도 받아서 직접 제의 안으로 챙기셨다. 그때 보았던 교황님의 따듯한 미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입맞춤은 예로부터 평화와 우호의 상징으로 계약의 조인에도 사용되었다. 발이나 손에 하는 입맞춤은 겸손과 자발적 복종, 존경의 표시이다. 지금도 외국 성지순례 때 보면 성인상의 발등에 고개를 숙여 입맞춤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스승을 배신해 악인들에게 넘겨줄 때 입맞춤 장면이 언급된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22,47-48) 입맞춤은 본래 애정과 헌신의 표시였지만 주님을 배반한 유다에 의해 악용돼 배반의 표시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해 돈을 받고 팔아버려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죄책감에 시달려 자살로 생을 끝마쳤다. 예전에는 유다가 ‘예수의 13번째 제자’라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13명의 사도단은 실제로 없었다. 지금도 서양권에서 성행하는 숫자 13을 기피하는 문화는 유다가 그 시작이었다. 유다는 사도단의 살림을 맡을 정도로 예수님의 신뢰를 받았다. 단체에서 돈주머니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 그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죄인들의 손에 팔아넘긴 이유는 성경에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스승이 유다인을 로마로부터 독립시킬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라는 점이 그를 실망하게 했을까?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가끔 일하다 보면 진짜 걸림돌은 내부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 장군이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앞으로 진격하는데 방해를 놓는 것은 독일군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편이 발목을 잡는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8면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