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성모님께 바치는 우리들의 노래

연록의 싱그러움이 눈부셔 오는 오월 이 아름다운 계절, 성모 성월 꽃향기 은은히 젖어드는 오늘 이 저녁 성모 어머니, 저희 자녀들이 당신의 무릎에 이렇듯 모여 장미꽃다발을 엮어 당신 발아래 드리옵니다. 어머니, 당신은 맑고 그윽한 눈빛으로 한없이 자애로운 마음으로 지금 당신 자녀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당신의 모범을 따라 자녀답게 살아가기를 바라며 저희 마음을 낱낱이 꿰뚫어 보시는 어머니! 엇갈린 길로 부질없이 떠나갈 때도 아픈 마음 다독이시며 한없이 기다려 주시는 어머니.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쓰러질 때 어서 일어나라고 더운 손 잡아주시며 일으켜주시는 어머니. 그 손 미처 잡지 못하고 지쳐 넘어질 때 그래서, 한없이 울고 싶을 때 어서 오너라 얘야, 내가 여기 있노라 넓은 치마폭으로 품어주소서 아니. 이미 당신 치마폭이 저희를 감싸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소서 천상어머니! 이 시간 저희들의 모든 소망들을 장미로 피워내는 믿음을 청하며 아름다운 기도의 꽃을 바칩니다 다정한 어머니의 이름 부르며 저희 모두 하나 되는 아름다운 이 저녁 우리 모두 당신께 바치는 한송이, 한송이 꽃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글 _ 윤판자 효주 아녜스(대구대교구 대곡본당)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22면

[독자마당] 영화 <콘클라베>를 보고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전 세계가 사랑하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였다. 지금 새 교황의 탄생을 기다리며, 최근에 상영된 영화 <콘클라베>가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시작된 콘클라베 3일간의 과정을 다루었다. 짧은 시간의 이야기이지만 여기에 우리 교회의 모습이 잘 담겨있다.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거룩함이 드러나고 콘클라베의 주체가 바로 성령임이 밝혀진다. 첫째, 교회의 고뇌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회의를 주재하는 수석 추기경 ‘토마스 로렌스’가 주인공 역할을 하며 회의를 이끌고 가는데, 그 이름이 의미하듯 의심하고 질문하며 진리의 길을 찾아간다. 그는 첫날 강론에서 “확신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죄”라고 하며 추기경들에게 경고하는데, 교회는 결코 자기도취나 편안함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모습이다. 최다 득표를 이어가고 있는 아프리카 추기경의 성추문이 드러나고, 교황직 선출을 위해 미리 추기경들을 매수하는 성직 매매의 추악함과 자신의 탐욕을 위해 상대의 과거사를 들추어내는 불의와 부정직한 인간성이 드러난다. 셋째, 교회의 거룩함이다. 교회는 인간이 이끌어가지 않고,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처럼 거룩한 성령께서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심을 말한다. 회의 전날 갑자기 명단에도 없는 추기경이 등장한다. 이분이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며 마지막에 새 교황으로 선출된다. 마지막으로 교회 여성의 역할을 볼 수 있다. 콘클라베 회의 동안 수녀들은 회의를 위해 요리를 하고 세탁하는 가정부의 역할을 하지만, 성추문과 성직 매매의 진실을 밝힌다. 여성이 교회의 리더 역할에서 배제되지만, 진실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있다. 마지막에 놀랄만한 반전이 있는데, 이 신선한 충격이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을 스포일러하지 않기 위해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이것을 통해 내다본 전망만 밝힌다. 가톨릭교회의 여성 사제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 그 필요성과 요구가 빗발치지만, 지금까지 아직 유보된 상태이다. 그 이유로 제시되는 것은 이는 교회 전통에 어긋나며, 예수님이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사제)의 인격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참조: 「직무 사제직에 대한 여성 수용의 문제에 대한 선언」(Inter Insigniores, 1976)) 그렇다면 여성의 인격 안에는 예수님께서 현존하시지 않을까?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바로 그 의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존경한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 사회의 소외된 자인 성소수자들까지도 껴안았다. 또 역사상 첫 교황청 여성 장관까지 임명한 진보주의 성향을 보였지만, 여성 사제직에 대해서는 문을 열어놓지 않았다. 지금 새로운 ‘교황 선출을 위한 기도’를 바치면서, 이번 교황은 누가 되더라도 그 개혁의 문을 활짝 열어놓을 수 있는 분이기를 열망한다. 또 그렇게 되기를 믿는다. 콘클라베의 주체는 그때마다 놀라운 반전을 일으키시는 성령이시니까. 글 _ 마리 파울리타 수녀(노틀담 수녀회)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6면

[독자마당] 사랑과 은총의 성모님

5월의 싱그러운 바람이 옷깃을 스미는 이 밤 이곳 쌍령산 정기 타고 미리내 유무상통마을의 성당 앞 성모님은 아기 예수를 안고 5월의 꽃 속에서 인자로운 어머니를 바라봅니다. 오늘 밤 여기 오랜 세월의 식솔들에게 5월의 푸른 초록으로 물들게 하듯 세상의 온갖 궂은일도 이승에서 무수히 겪어온 기쁜 일이나 슬픈 일도 혹은 높은 파도와 거센 바람을 헤치고 그리도 모진 삶 살아온 내력도 이제는 조용히 내려놓고 그 이름도 성스럽게 은하수의 빛이 흐르는 이곳 미리내성지 유무상통마을에서 인자로운 당신의 고운 미소를 닮아가듯 하루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토록 여기까지 나를 지켜주고 살펴주시니 천상의 어머니가 아니던가. 캄캄한 밤이거나 환한 대낮이거나 내 속속들이 원죄까지 살펴보시니 흐르는 세월처럼 더욱 그리움만 다가옵니다. 언제나 얼굴 붉히지 않고 내 허물을 들추어내기보다 지혜를 가르쳐 주었으며 마음을 다지고 살아가는 일 절망하지 않고 희망 속에 사는 법을 내게 일러주신 어머니께 오늘 밤 촛불을 밝히며 두 손을 모읍니다. 세상살이 때로는 가슴 아리도록 슬픔과 아픔이 시험에 들어도 오직 성모님만 바라봅니다. 새순이 움트는 새 소망과 희망으로 피어나는 오월이 눈이 시리도록 당신을 기다립니다. 그리하여 오늘 밤 허공 속에서 활짝 핀 장미처럼 따뜻한 위로의 꽃이 되어 세상의 오만가지 두려움도 걱정도 가시고 굳었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도록 성모님을 온 몸으로 바라봅니다.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이 밤 한껏 아름다웠던 지난날들이 내게는 한없이 영광이었습니다. 언제나 사랑의 이름으로 변함없이 한평생 성모님을 가슴에 품고 사는 이 몸 여기 유무상통마을에서 마지막 행복한 삶을 지켜주신 성모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신비의 오월은 진한 초록의 기적이며 내게 사랑과 은총이 되리라 세상을 마음속 깊이 새겨가며 당신의 구원으로 엮은 꽃다발을 이제 고운 빛 가슴에 안고 이 밤 성모님께 장미꽃 한 묶음 바칩니다. 글 _ 배의순 요한 보스코(수원교구 미리내본당)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22면

[독자마당]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추모하며

사랑의 성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검소함으로 시작해, 실천으로 보여주신 그 사랑은 말이 아닌 삶 그 자체로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닿았고, 교황님의 존재는 이 시대의 빛이자 위로, 희망 없는 자들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셨습니다. 한국 땅을 밟으셨을 때, 작은 경차에 몸을 싣고 겸손히 가셨던 그 모습은 우리를 놀라게 했고, 감동하게 했으며, ‘교황’이라는 이름보다 더 큰, 한 인간의 진정한 사랑의 무게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이 계시기에 세상이 아직 괜찮다고 믿었던 마음과, 그분의 말 한 마디에 삶을 붙들 수 있었던 희망을 조심스럽게 떠나보내야 합니다. 교황님이 떠나신 이 순간, 우리 마음 한 켠엔 말할 수 없는 허전함이 남았습니다. 의지하던 어른이 떠난 것 같은 슬픔, 깊은 어둠 속에서 바라보던 등불이 사라진 듯한 불안함.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 빈자리는 곧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주는 울림이라는 것을. 교황님, 당신이 살아내신 사랑은 이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이 되었습니다. 부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세상을 위해 계속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떠남은 끝이 아닌 시작이며, 그 사랑은 이 땅 위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 글 _ 노정남 아가다(서울대교구 한강본당)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22면

[독자마당] 예수님의 4월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시 <황무지>에서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의 시인 용혜원은 <목련꽃 피는 봄날>에서 4월의 대표적인 꽃 목련을, ‘삶을 살아가며 가장 행복한 모습 이대로 피어나는 꽃’이라 했습니다. 가장 잔인함을 체험한 뿌리라야 가장 행복한 꽃을 피울 수 있나 봅니다. 예수님의 4월이 그러했지요. 참으로 기막힌 잔인함의 삼 일이 일 년 중 가장 거룩한 성삼일이라네요. 가장 거룩한… 지난 겨울 우리 집 위층에서는 새로 이사 온 주인의 대대적인 집수리가 있었습니다. 중학생 정도의 소년과 그 소년의 어머니가 집을 수리하겠다며 동의서를 받으러 왔는데, 공사 일정을 물으니 얼마나 걸리는지도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파트에서는 아무리 작은 공사를 해도 연락처랑 일정, 공사 내용을 정확하게 게시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상례인데, 더구나 병원에서 퇴원한 남편이 종일 집에 있는데 바로 위층이라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습니다. 그러나 집을 장만하고 수리하고 이사 오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기쁠지 생각하니, 거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만 “환자가 있는데…”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동의서에 서명을 해주었습니다. 곧이어 업체의 연락처도 주인의 전화번호도 없는 종이 한 장에 일정이 20일이나 걸린다는 게시물이 승강기 벽에 붙었습니다. 공사 기간이 길어서 일부러 모른다고 했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화가 났습니다. 바른대로 말하고 양해를 구했어도 서명을 해주었을 텐데 말입니다. 큰 소음과 진동으로 2~3일은 힘들었지만, 무리 없이 약속된 시간이 지나고 안심할 즈음, 현관문 앞에 놓인 예쁘게 포장된 작은 화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야생화처럼 겸손하고 다소곳하고 작은 얼굴을 가진 예쁜 꽃 속에, 메모지가 꽂혀 있었습니다. ‘덕분에 수리 잘하고 어제 이사를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꽃의 이름이 ‘꽃기린’이며, 일주일에 한 번만 물을 주면 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저는 기꺼이 선한(?) 이웃이 되어주려 했던 마음을 이해받지 못한 것에 화가 났었는데, 솔직하게 말 못 한 그 이웃도 화분을 준비하면서까지 노심초사했던 것입니다. 뿌리와 꽃이 다르듯 우리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참 많이 닮은 이웃이었습니다. 그 꽃의 꽃말이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예수님의 꽃)인 것을 후에야 알았습니다. 어느 날 청소를 하다가 예수님의 꽃, 꽃기린의 가시에 손이 찔려 아픈 손가락의 피를 훔치는데 언뜻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보시며 이런 기도를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리고 저도 잠시 멈추어 이렇게 기도합니다.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시편 17,8) “당신 계명을 떠나 헤매지 않게 하소서.”(시편 119,10) 주님의 성삼일은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뿌리를 가진, 가장 행복한 꽃들의 시간입니다. 글 _ 박명순 드보라(수원교구 초월본당)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6면

[독자마당] 아름다운 동행

입춘, 우수가 지났지만, 아직도 차가운 바람이 귀를 얼리는데 길가 빌라 기둥 옆에서 전화를 받는 자매를 보고 있다. 갑자기 “영분아! 정신 차려! 누구든지 한 번은 겪게 돼 있어. 연령회에 연락을 해놓을 테니 형제님이 운명하시면 전화해. 내가 갈게!” 휴대전화 저편에서 겁에 질린 율리아나 씨의 목소리가 울먹거렸고 통화를 하면서도 루치아 씨는 울고 있었다. 내 코끝이 시큰거렸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동행인가! 너무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을 때 같이 울고 위로해 주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행복한 신앙의 동행들이 아닌가! 우리는 인자하신 어머니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고 이들은 한 동네에 30여 년을 살면서 신앙 안에서 신뢰와 우정을 쌓아온 절친들이다. 결국 그날 저녁에 율리아나 씨의 형제님(대세를 미리 받으셨다)은 안타깝게 운명하셨고 성당에는 연도 공지가 떴다. 나는 갑자기 토사곽란이 나서 자정에 응급실에 갔고 3일을 꼼짝 못 하다가 삼우제 날에 기를 쓰고 미사를 봉헌하러 가서 율리아나 씨를 만나 때늦은 위로를 했다. 그다음 주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 출석한 율리아나 씨는 핼쑥하지만, 밝은 얼굴로 우리에게 식사 대접을 했다. 내가 식사를 끝내고 “율리아나 씨 대단하세요. 나 같으면 못 일어났을 텐데”라고 했더니 그는 웃으며 두 손으로 15명 정도 되는 자매들을 가리키며 “모두들 도와주신 덕분에”라고 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랬다. 율리아나 씨는 형제님을 떠나보낸 그 힘든 상황을 세속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한 교우들과 소통하며 하루하루를 이겨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쏟아지는 햇빛 속을 걸으며 ‘나도 그런 동행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한 자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나도 어려울 때마다 기도해 주는 영적인 동행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주님은 공평하십니다” 고백이 절로 나온다. 따뜻해지는 등에 기운을 얻으며 행복한 걸음으로, 다음엔 만나면 즐겁게 얼굴을 마주하고 그 자매의 긴 하소연을 들어주리라 다짐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네. 푸른 풀밭 시냇가에 쉬게 하사. 나의 심신을 새롭게 하네.” 글 _ 조선자 아나스타시아(서울대교구 면목동본당)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22면

[독자마당] 영화 〈콘클라베〉를 통해 돌아본 신앙인의 자세

최근 개봉한 영화 <콘클라베>를 보고 신앙인으로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인간 창조 섭리를 다시금 숙고하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이 영화를 두고 교황청을 배경으로 한 최고의 정치 드라마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황 선출에 따른 온갖 음모와 권력 투쟁에 대한 현상을 뛰어넘어 개인적으로 교황 선출 과정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가톨릭 신앙의 본질과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자세를 다시금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잔잔한 감응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이 영화 속으로 잠시 들어가 봅니다. 교황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교황청은 혼란에 빠집니다.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전 세계의 추기경 108명이 철저한 보안 속에서 시스티나 경당에 모입니다. 콘클라베(Conclave)라 불리는 이 과정은 신성한 의식이자 치열한 정치 싸움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습니다. 스캔들, 배신, 음해, 권력 다툼이 얽힌 선거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의미와 메시지를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권력의 속성입니다. 신앙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교황 선출 회의조차도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둘째, 도덕성과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신의 뜻을 따르려는 이들이 인간적인 욕망과 갈등에 휘말리는 모습을 통해 깊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셋째, 선택의 의미입니다. 한 사람의 결정이 전 세계에 미치는 커다란 영향력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교황 선출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인물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후보가 되고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져 ‘세상사가 거의 엇비슷하구나’, ‘이 또한 나약한 인간의 행태에 지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게 됩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도 대선이든 총선이든 처음 기대와는 달리 의외의 변수가 크게 작동한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이 또한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일 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다고 믿게 됩니다. 신의 인간 창조는 신비스러움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고 거스르는 일은 어리석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성소수자나 양성을 한 몸에 간직하고 태어남도 역시 신의 섭리라 믿어야 하겠지요.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특별한 목적이 있음에 분명하니까요. 이를 거슬러 자신이 원하는 대로 수정하거나 강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뜻을 역행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교우들 중에는 신부님과 수녀님 때문에 성당에 나오기 싫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제가 볼 때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알면 다쳐~”,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어쩌면 교황청의 교황 선출이나 본당의 상황,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신앙을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는데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듯이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은 어떤 구실과 핑계에도 뛰어넘을 수 있는 강력한 처방전임을 믿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데살로니카 5,16-18)라는 말씀에서 확고한 신앙인의 자세를 찾고자 합니다. 글 _ 전재학(대건 안드레아, 인천교구 중3동본당)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22면

[독자마당] 사순의 때를 보내며

사순의 때는 회개의 시간 잘못 가던 길 멈추고 돌아서서 주님께로 마음을 향하여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제, 나는 돌아온 탕자의 마음으로 십자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사랑, 한없이 내어주신 펠리컨 사랑 그 사랑 앞에 고개 숙이고 나를 돌아봅니다. 모든 관계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무심히 던진 무례한 말과 행동들, 사랑과 정의를 외면한 죄악들을 돌아보며 주님께 참회의 눈물로 용서를 청합니다. 사순의 때는 은총의 시간 십자가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고난의 길,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 지고 가시는 골고타 언덕길의 주님 고통을 아파하며 내 죄의 허물이 하나씩 하나씩 벗겨지는 은총 입기를 원합니다. 미움과 질투, 완고함과 교만함. 탐심과 집착으로 칭칭 감겨진 내 몸을 주님 십자가 희생 사랑으로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타작마당의 빛나는 알곡처럼 언제나 주님 앞에 수정같이 맑은 모습으로 서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사순의 때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안에서 한없이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인류를 위해 비우고 비우신 사랑 죄악에 가득 찬 세상 구하시려 권능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신 사랑 찢기고 상처 난 성체에 피 흘리시며 한없이 낮아지신 희생의 사랑 ‘창으로 찌르니 물과 피가 흘러나왔다’ 인간의 무례함과 무지와 완악함을 용서하시며 그 성혈과 생명수로 온 인류를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애끓는 사랑을 바라봅니다. 사순의 때는 거듭나는 축복의 시간 이제는 미움과 분열로 닫힌 마음이 주님의 영을 받아 용서와 화해로 강물 같은 평화 이루기를 다짐합니다. 은혜로 내려주시는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약동하여 나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끌어안는 사랑, 머리에서 멈추지 않고 가슴으로 받아 안는 뜨거운 사랑 이루기를 다짐합니다. 주님! 이 사순의 때에 제 존재와 하느님 사랑 기억하게 하시어 십자가 주님의 희생 사랑을 닮아 가게 하소서.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 글 _ 김영희 요셉피나(서울대교구 묵동본당)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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