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천사들과 같아져서…”의 의미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2,30; 마르 12,25; 루카 20,36)는 말씀은 인간의 본성이 천사의 본성으로 변화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부활 후 인간의 본성이 천사처럼 된다면, 그것은 부활이 아니다. 반육화되거나 비인간화된다면 그것도 부활은 아니다. 이 말씀 전후에서 드러나는 부활의 진리는 인간의 종말론적 완성과 행복이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만의 상태가 아님을 명확히 하며, 모든 이해와 표현을 초월한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인간 본질을 회복함을 뜻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고, 고통과 시련을 거치면서 하느님과 같은 신성(영)이 자신 안에 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영의 힘은 인간의 본성을 영화(靈化)로 이끈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것은 영에 대한 몸의 새로운 순종을 의미한다. 영화는 주체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기울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부활은 세속적인 시간 안에서 죽음에 종속되었던 인간의 육체성이 참된 생명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66과 5항) 교리서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순간 일어나는 영화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영화’가 인간 이해의 새로운 출발점이기에, 그 결정적인 의미들을 깊이 들여다봐야 막연한 부활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다양한 형태로 드러내는 선택과 결정을 하고 행동할 때가 많다. 육에서 오는 것과 영에서 오는 것의 대립을 어둠에서 빛이 들어올 때까지 수없이 체험하지만, 영의 영향권에 있는 곧 ‘종말의 인간’은 그 대립에서 자유로워진다. “‘영화’란 단순히 영이 몸을 다스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는 영화를 영이 몸에 완전히 스며들어, 영의 힘이 몸의 에너지로 스며드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67과 1항) 스며들어 생명의 힘이 확장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한다. 영이 받은 사명이다.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상 삶에서 일어나는 대립과는 다른, 몸에 대한 영의 결정적 승리를 말한다. 완전한 참여로 이루어지는 영화다. 교황은 부활한 이들이 갖는 ‘몸의 영광’을 ‘신화된 영화’의 종말론적 결실이라 말한다. 교황은 이 상태가 ‘한처음’과는 다른 차원이라 한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가 한처음의 상태를 회복하는 정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새로운 인류의 완성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화’의 상태를 넘어 신화(神化)의 상태에 이른다. 그 모습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만날 수 있다. 제자들도, 마리아 막달레나도, 부르기 전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부르자 바로 ‘주님’이라 고백했다. 이어지는 부분과 변화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 자체로 신이지만 인간은 영에 의해 영화됨으로서 신화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3, 1136항) 영은 성령을 말하고, 종말론적 인간은 성령의 힘이 몸에 스며들어 삼위일체의 신성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내재해 있는 하느님의 영이 그 반대되는 세력들과 대립을 거치면서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과 영적 앎이 진·선·미로 성장된다. 결국 신화는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 특징을 가진 친교로 이루어진다. 교리서 66과 6항은 이렇게 정리한다. “사실 부활의 진리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종말론적 완성과 행복은 몸으로부터 분리된(플라톤에 따르면 ‘해방된’) 영혼만의 상태로 이해할 수 없고, 결정적이고 완전한 통합을 특징으로 하는 몸과 영혼의 일치를 통해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통합된’ 인간 상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글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마르 12,25)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큰 오해를 불러올 말씀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6)는 말씀이 이어진다. 부활에 관한 예수님 말씀들은 인간에 대해 깊고 일관된 내적 진리를 지니고 있다. 내적 진리가 역사 안에서 우리의 이성과 체험에 의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지만 우리의 지성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리의 빛을 받는다면 초본성적인 힘에 의해 그것을 관조할 수 있다. 물론 육체를 지닌 인간 상태로서 그 한계를 넘는 부분이 분명 있지만 이 세상에서 체험되는 몸의 경험은 하늘나라에서 체험할 몸의 경험을 알기 위한 토대와 기초를 제공받는다. 즉 한처음이 현재와 관련 있듯이 미래 또한 현재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됐고(창세 1,27 참조), 서로 다름 안에서 “한 몸이 되리라”(창세 2,24)는 섭리가 있었다. 저 세상에서 새롭게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완성에 속한다. 이 세상에서 상호 자기 증여를 표현하는 부부 행위는 생명이라는 선물에 대한 열림을 가져온다. 이 행위는 신체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이다. 그래서 번식 능력이 주어졌고, 출산의 축복을 통해 충만을 이룬다. 그러나 저 세상은 이미 축복과 충만의 상태임으로 출산을 통한 충만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 그 스스로에 관한 진리가 무엇인지 다루고 있다는 사실, 즉 남자와 여자의 진리를 출산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 역사가 구원의 신비로 가득하고, 그 신비가 완성되는 부활의 관점에서 인간의 가장 깊은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몸이 지닌 혼인성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의 진리에서 ‘혼인적’ 혹은 ‘혼인성’의 의미는 혼인과 출산 그 자체에만 결정적 의미가 있지 않다. 왜냐하면 몸의 혼인성은 직접적인 혼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내어주는 인격성의 관계로 여러 종교에서나 사회 안에서 여러 형태의 영적 낳음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세상에서는 몸의 혼인성이 완성됐기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교리서 69과 4항 본문 마무리 부분에서는 혼인성의 아름다움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곧 부활한 미래의 삶에서 몸이 지닌 ‘혼인적’ 의미는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격이라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인격들 간의 친교에서 실현된 그 이미지에 완전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으로 존재하는 것의 그 ‘혼인적’ 의미는 완벽하게 인격적이고 공동체적인 의미로 실현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신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6)의 뜻을 알 수 있다. 교황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지는 문턱에서 몸의 영화가 이루어짐에 더 머물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인간 이해의 새로운 출발점이기에 변화하는 그 결정적인 의미들을 깊이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인격인 인간 존재와 남자와 여자의 몸으로 존재하는 의미를 분명히 하는 통합된 인간 진리의 새로운 문턱을 넘기 위해서다. 에페소 서간 5장 30절과 31절에서 “한 몸이 된다”가 다시 소환됐고, 그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서 더 선명히 계시됐다. 땅에서 유한한 존재였던 인간은 몸에 쓰인 혼인성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해 영원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 없어지거나 폐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활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3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드러내는 하느님은 타자를 불러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밝히고 소통한다. 모세에게도 그랬다. 모세는 호렙산의 타오르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 존재를 인식하고, 더욱 가까이 보기 위해 다가갔다.(적극적인 자세) 이때 하느님은 모세를 불렀고, 모세는 응답했다. 이처럼 인간은 하느님의 어떤 대상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큰 타자에 의해 부름 받고 응답하는 주체이다. 그리고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보듯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알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갈망을 통해 자신을 넘어 타자에게 건너간다. 모세는 하느님께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는 사명과 파견을 듣는다. ‘내가 어떻게?’라는 질문에 하느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그리고 야곱의 하느님”이라 계시한다. 이들은 인류 역사 안에서는 분명 죽었지만 하느님의 능력으로 산 자, 즉 죽음의 문을 통해 살아있는 하느님께 들어감으로써 산 자가 됐음을 뜻한다. 이 대화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하느님께 닿았고, 그들을 위해 모세가 해야 할 사명과 파견이 하느님의 뜻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하느님을 불러오고,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 역사 밖에 있지 않았고, 모세는 역사적 상황 안에서 초월적인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세 측면의 관계가 역동적으로 살아있으며 직간접으로 소통하는 형상이다. 예수님에 의해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 다시 불러오고 확인된다. 그리고 덧붙이길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27) 죽음은 그 사람의 존재 안에 부활한 생명이 있음을, 그 생명이 하느님 안에서 변화하는 구조임을 강조한 것이다. 죄로 인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힌 것 같지만, 하느님은 인간을 죽음에 두지 않고 인간들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고 생명의 실재를 새롭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 새로워진 계약은 인간이 죽음으로 무(無)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초청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보이지 않는 형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사두가이들에게 한 부활 이야기는 예수님 죽음 이전 상황이었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증거 되었으며,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부활에 대한 통합적 전망을 내놓을 수 있었다. “물질적인 몸으로ᅠ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 우리 모두 죽지ᅠ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44) 부활은 인간에게 역사의 차원을 벗어난 저 세상의 이야기고, 하느님 편에서 주도하는 일이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관점으론 수용이 다 되진 않는다. 하느님의 정의 안에서는 생물학적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음을, 죽은 이가 무(無)로 추락하지 않고 본래적 실재인 생명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지혜 2,3: 16,13 참조) 누구도 이름을 붙여 소유할 수 없는 그분인데, 누구도 언급할 자격이 없는 그분인데, 스스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라 다가오셨다. 해방될 수 없는 죽음이지만 온전히 신뢰하고 그 신비에 들어갈 때 선물이 된다. 매년 부활초에 ‘알파요 오메가’를 쓰고 듣고 찬양하는 이유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에 관한 사두가이들의 이해에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 12,24.27; 마태 22,29)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신다. 교리서 본문은 예수님 이전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명확하게 선포한 가르침을 제시한 이가 없었고, 예수님의 대답이 지닌 의미는 대단히 깊고 정확하다고 말한다. 부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역사 안에서 인간의 지식과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에 상응하는 차원이고, 또 인간이 하느님 생명의 숨으로 불어넣어진 몸이라는 사실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이야기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러 신화적 신들을 부정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얻어진 세계관을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전수했는데,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르게 표현된 내용들이 있음을 구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라며 하느님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킨 것이다. 즉 부활은 하느님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고, 죽음을 건너 저 세상의 일이라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논리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위대한 질문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전형적인 질문을 자신의 고통 앞에서 했던 욥을 만나 보자. 욥은 의인이었고 큰 죄를 범하지도 않았으며 부귀와 권세를 지녔다. 그런 그가 받은 첫 번째 시험은 자신의 소유에 관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병을 얻은 후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욥은 그의 소유였던 집과 가축 그리고 귀한 자식을 잃었을 때도 동요하지 않고, 하나씩 잃을 때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 1,21)라며 하느님을 찬미했다. 소유한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그는 병이 들었다. 이제는 소유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몸에서 느끼는 큰 고통은 절망을 주었고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욥 3,11-12)라며 자신의 생을 원망한다.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은 전통적 가르침에 따라 고난과 불행은 죄 때문에 당하는 형벌이니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라 말한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말을 받아들이지도, 더 이상 무릎을 꿇지도 않고 하느님께 질문한다. ‘왜 입니까?’ 병으로 인한 고통이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은 하느님에게만 가능하고 또 그분만이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 입니까? 내가 죽어 어디로 간다는 것입니까?’ 하느님은 욥이 스스로 질문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폭풍 속에서 거침없이 말씀하신다.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욥 38,4이하). 이는 ‘내가 너를 만들 때 너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한 것이 뭐가 있느냐?’는 의미다. 지혜로운 욥은 질문의 속뜻을 알아듣고 고백한다.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뵈었습니다(보다)’는 하느님과 인격적 친교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자신의 고통 앞에서 온몸으로 던진 질문은 존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을 불렀던 것이다. 불렀고, 만났고,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에서 나와 그 사랑을 향해 돌아간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사두가이들이 범한 오류는 성경을 자신들의 세계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이해하려 했던 것이고, 욥의 친구들처럼 자신들의 공로로 얻어진다고 잘못 생각한 것이다. 부활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능력과 스스로 당신을 드러내는 생명이신 그분과의 만남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욕망, 원초적 알몸이 지닌 의미의 근본적 변화

요한의 첫째 서간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인간에 관해 계시된 진리를 듣지 못하게 하는 세 가지 형태를 육의 욕망, 눈의 욕망,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이라 했다.(2,16-17 참조) 이 욕망들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 즉 욕망 그 자체보다 욕망의 근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밝히며 인간에 관한 진리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그리고 사람이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2,23) 외치며 서로를 보았던 신적 시야가 ‘음욕을 품고’ 바라봄으로써 그를 소유 혹은 사용하려는 대상으로 변화된 것이다. 먼저 우리가 짚어야 할 것은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3,10) 자신들의 실존 뿌리인 알몸을 부정하고 숨었지만 그분의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그분을 부정한다 해도 나는 그분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창조의 질서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알몸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부끄러움과 연관되는데, 사람이 그 의미를 어떻게 적용하는지 그 변화를 살펴보자.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2,25)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3,7)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3,10) 부끄러움이 두려움으로 변화했다. 존재 자체를 뒤흔든 ‘두려움’, 감정으로 느낀 이 두려움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것을 덮으려 했을까? “타락의 증상인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부분은 이 구절이 들어 있는 문맥 안에서 숙고되어야 하고, 부끄러움은 그 순간 가장 심오한 차원을 건드립니다.”(27과 1항) 하느님의 모상성과 유사성인 인간 본성은 선물로서 스스로 내어줌인데 그것을 덮겠다는 것은, 하느님과 관계없는 내가 되겠다는 것이고, 나 또한 너에게 선물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먼저 “너 어디에 있느냐?”(창세 3,9) 물었다. ‘무엇을 했느냐?’고 묻지 않고, ‘너’라는 존재 뿌리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확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알몸이 두려워 숨었다고 말하지만 따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은 그 사실을 두려움으로 덮어 놓은 부끄러움, 그의 잘못을 일깨운다. 사람의 대답에서 하느님에 대한 앎의 결핍이 드러남을 묵상할 수 있다. 놀랍게도 하느님에 대한 앎이 부족하면 자신에 대한 앎도 부족하고, 앎에 대한 결핍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결핍으로 이어진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에서 그 구체성만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의 정확함이 우리를 놀랍게 한다. 육에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인간 감정의 표현과 깊이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성과 유사성을 지닌 인간 몸의 속성을 거부한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선물로 나에게 왔고, 그 선물을 다시 내어줌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관계의 단절은 곧 하느님과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앎의 결핍이 인간 정신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욕망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깊이 와닿는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6-19) 내어주는 사랑의 관계를 떠나면 남을 탓하여 자신을 지키려 하고, 사랑의 관계로 돌아갈 때는 관계 속의 ‘너’에게 참회와 고백을 한다. 그래서 먼지로 돌아가라는 말씀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은 한 선상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3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시다

“구약의 여러 책들에 나오는 결의론은 외적인 기준들에 따라 그러한 ‘몸의 행위’를 구성했던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집착하였고, … ‘마음의 완고함으로 인해’ 비롯된 다양한 타협들 탓에 율법 제정자가 원하셨던 계명의 본래 의미가 변질되었습니다.”(24과 4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2부의 주제, 인간 몸의 존재론적 진리와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규범적 성격으로 풀기 위해 창세기 3장으로 가야 된다. 태초의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은 후 하느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힌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ᅠ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3,22) 이제 사람에겐 스스로 선과 악을 식별하는 인식과 지성의 능력이 있음을, 그리고 그에 따른 선택 또한 인간이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하느님은 자기 계시(“우리 가운데 하나처럼”)를 복수로 일컫고, 이제 사람도 절대 진리,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22절의 후반부가 선명해진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이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하면서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셨다. 이제 인간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원상태로 회복해야 한다는 과제가 인간 편에 주어졌다. 사람이 알지 못했던 부분을 알게 되어 한처음의 상태와는 달라졌고, 그 달라진 상태의 원회복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비추어 그의 내면과 마음에서 자신을 되찾아야 합니다. 마음은 인간 몸의 의미에 대한 감각과 이 감각의 질서와 연관된 인간성의 차원입니다.”(25과 2항) 인간이 ‘그의 내면과 마음에서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이유는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이 자신 안에 있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하느님의 거처, 곧 선의 거처이기에 그리스도는 단죄가 아니라 회복해야 하기에 호소를 한 것이다. 더 나은 영적 삶, 그리고 완성을 원하는 삶이라면, 자신이 겪은 일과 결과에 몰입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인 ‘마음’을 살펴야 한다. 「티베트의 지혜」에서는 “마음을 안쪽으로 되돌려 마음의 본성에서 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했다.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인식과 행위는 모두 마음을 통해 가능하다고 했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짐작하고, 또 이해하는 통로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너무나 예민하고 오묘한 것이어서 쉽게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는데, 이는 자신을 망가뜨리는 길입니다”고 했다. 장자는 인간의 마음은 절대적 자유를 원한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문제는 결국 인격 의식과 정신적 자유의 문제로 돌아가고, 마음의 절대적 자유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짧은 말씀 안에 간직된 세 가지 요소,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의 의미, 그리고 ‘마음으로 범하는 간음’에 대해 우리는 차근차근 묵상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인간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유를 거두지 않으시고, 앎에 의한 그들의 선택이 땅에 묶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마음 교육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마음 교육은 인격적인 본성을 찾도록 도와주고, 세상의 어떤 욕망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내적 힘을 갖게 한다. 그럴 때 많은 배움들은 자신만이 살겠다는 바벨탑으로 변하지 않고, 인류에게 나누는 능력이 된다. 앎과 나눔은 한 선상에 있는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마음의 구원 - 참된 자유

지금까지 우리는 교리서 1부 ‘한처음’(1~23과)에 대한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1부는 존재, 즉 ‘나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고, 오늘부터 펼치게 될 2부는 ‘마음의 구원’으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이 내적 인간, 즉 마음이 무엇을 갈망하는지 바라보게 한다. 마음의 구원편은 무려 1년 1개월(1980년 4월 16일~1981년 5월 6일) 동안 교황의 수요 교리로 계속됐고(특별한 전례 시기는 제외), 그 분량도 40과(24~63과)에 이르는 대단원이다. 2부의 중심 말씀은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이다. 교황은 이 말씀에서 ‘몸 신학’의 핵심적 의미를 찾았고, 마음이 그 모든 것의 출발이요 중심이라 보았다. 한 인간의 생애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행위들은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움직인 것이기에 외적으로 드러난 행위를 판단하기 전에 내적으로 어떤 상태였는지 먼저 살피라는 뜻이다. 즉 왜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는지, 무엇에 묶여 있었는지를 먼저 살펴 참된 자유, 곧 한처음 상태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회복하여 한처음 상태에 놓이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고, 그는 하느님을 뵙는 참된 행복에 머문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말론적 의미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일어나는 부활의 삶이다. 1부에서 다루었던 바리사이들과의 이혼에 관한 논쟁(마태 19장, 마르 10장)처럼, 마태오 5장 27절과 28절의 말씀도 창세기 첫 장까지 거슬러 올라야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도 다른 말씀과 마찬가지로 규범적 성격을 뚜렷하게 띠고 있기 때문이다.(24과 2항)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말씀뿐만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가 갖는 정황도 그 의미가 얼마나 폭 넓은지 알 수 있을 때, 제6계명인 ‘간음하지 마라’는 복음적 의미에서의 ‘이해’와 ‘완성’이라는 두 가지 모습을 만나게 된다. 인간 행위의 윤리 기준을 외적으로만 보고 판단하던 것을 이제 내적으로, 즉 마음에서 다루는 에토스의 중요한 전환점을 새롭게 제시했다. 또 규범적 성격을 띤 이 복음 구절에 대해 인간적 해석은 하지 말 것을 먼저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2부에서 다루는 중심 성경 말씀의 본질에 이르려면, 간음의 범위를 다시 보아야 한다. 구약시대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혼인 관계로 보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떠나 세상 것을 쫓을 때 간음이라 표현했다. 신약시대는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이는 율법이 아니라 영에 따라 가능한 것으로, 그 영의 자리가 바로 마음으로 제시되었다. 세례자 요한은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면서 자신을 율법에 비추어 말했다. 외적인 율법의 영향은 작아지고 복음은 내면에서부터 커져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문제의 본질, 즉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원하고 있다. 이는 윤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인간학적인 이유에서도 문제의 본질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옮긴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몸의 삼중성

인간은 태어나서 죽기까지가 자연적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열고 타자에게 닿고자 하는 자아 초월적인 면을 지닌 양면성의 존재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적인 가치에서 끊임없이 초월적 가치를 선택하고 그 완성을 바라는 이들이다. 이 양면성은 자신의 전 생애를 자녀적 몸, 혼인적 몸, 부모적 몸으로 변화시킨다. 이를 몸의 삼중성이라 하는데, 단순히 육체적이고 외적인 신분만을 의미하지 않고, 내적이고 영적인 변화에서도 같은 질서이다. 삼중성의 특징을 어릴 때 갖고 놀던 팽이에 비유한다면, 팽이의 아래 뾰족한 부분은 자녀적 몸, 좌측 상단은 혼인적 몸, 우측 상단은 부모적 몸이다. 팽이가 잘 돌고 있을 때는 땅에 닿아 있는 심지 부분이 양쪽 두 축과 균형을 이룰 때다. 삼중성은 한 신분이 정리된 후 다음 신분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신분의 상태는 모두 타자에 의해 주어지는데, 부모에 의해 자녀가 되고, 너를 만나 남편/아내가 되며, 자녀를 만나 부모가 된다. 자녀적 몸은 남편과 아내의 친교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로 한 존재의 근본이요 알파이다. 자녀적 몸은 부모와 분리될 수 없고, 성장 또한 부모와 함께하는 가운데 부모됨, 가족됨의 온전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옷 입고, 내재해 있는 성령의 힘에 의해 하느님을 ‘아버지, 아빠’로 부르는 은총, 곧 자녀의 신분을 얻는다. 혼인적 몸이란 아낌없이 그에게 주고 또 전부를 받는 가장 완전하고 유일한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나의 관계를 혼인적으로 표현했다. 혼인적 몸에서 부모적 몸으로 넘어가지만, 잊지 않아야 할 중요한 점은 부모이기 전에 서로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배우자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유산으로 기억되게 하는 것이다. 부부의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 그리고 사랑은 자녀의 성장에 측량할 수 없는 큰 자양분이요 힘이며, 생명을 지을 토대이기 때문이다. 부모적 몸은 아브라함과 사라에서 그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창세 22장 참조) 사라를 명기하지 않았지만 본문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받고, “아침 일찍 일어나”(3절) 준비해 길을 떠난다. 그는 ‘왜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지’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마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 자녀를 보며 계획했던 자신들의 계획을 포기해야 하는 좌절도 맛보았을 것이다. 산을 오르며, 이사악이 번제물로 바칠 양이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7절), 아브라함은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는 응답으로 하느님께 신뢰를 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 모습은 자녀가 아버지를 넘어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돼야 함을 뜻한다. 오래 묵상해야 할 부분이다. 부모됨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그 여정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부모는 자녀의 근원으로서 또 다른 알파이지만 자녀의 오메가가 아님을,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부모와 자녀는 존재가 함께 확장됨을. “인간은 인간을 무한히 넘어선다.” 파스칼의 말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사랑’과 ‘사랑하다’의 관계

교리서 제16과 “일관된 증여가 사랑 안에 뿌리내리고”(1항), “행복은 사랑 안에 뿌리내리는 것입니다”(2항), “사람은 신적 증여의 가장 고귀한 표현으로 가시적 세상에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 안에 선물의 내적 차원을 가지고 (…) 그의 하느님과 닮은 고유한 모습을 가지고 세상 안으로 들어갑니다”(3항)는 사랑의 신학적 논리를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명사로 한처음의 ‘숨’, 세례 때의 성령,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내재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원천이며 근원적인 이 사랑을 철학에서는 에로스로 표현한다. 교회 문헌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떤 계획이나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느 모로 분명히 인간에게 부여된 것”(「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항)이라 에로스를 말한다. 인간 몸은 육체이고 영혼이다. 육체가 영혼을 지니고, 영혼이 육체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긴 세월 이 둘을 분리했고, 사랑 또한 에로스와 아가페로 나누어 서로 만날 수 없는 지점에 있는 사랑인 듯 말했다. 그러나 에로스는 인간 육체에 그 뿌리를 둔 성적 충동 그 이상이며, 인간이 자신의 삶에 열정적으로 집중하게 하고, 욕망과 희열, 감사하는 마음,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주는 선물이요, 생기를 주는 힘이다. “사랑은 영적이면서 동시에 관능적”이다.(「신학대전」 I-9) ‘몸 신학’은 에로스의 본래 의미를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또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설명한 놀라운 가르침이다. 관능적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는 긴 세월 교회 안에서 논란의 대상이었으나, 이제 그 놀라운 사랑의 얼굴을 찾았다. 많은 성인성녀들은 자신의 사랑을 에로스라 고백했고, 또 어떤 성인은 자신의 에로스는 예수 그리스도라 했다. 하느님은 성을 인격과 결합시켰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는’ 탁월한 형태를 말하셨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로스를 덜 열정적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인격적이게 만들어 그 정상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다. 에로스가 지닌 생명 에너지의 원천이 창조주께 있음을 받아들일 때, 모든 은총의 원천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에로스와 은총이 동반 관계에 있음을 알고 욕망들을 정화하여 타자에게 향하게 된다. 이때 ‘사랑’은 나의 지향과 선택에 의해 행위로 재창조되는 ‘사랑하다’가 된다. “성은 거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 육체성이 지닌 신비한 힘, 그 이상의 것입니다.”(2항) 어느 성소의 길이든, 에로스적 갈망 안에서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행위는 구원의 신비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재하던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백성이 사랑을 잠시 잊은 것이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떼를 쓰고, 찬미가에서 그 사랑을 노래한다. 묵시록에서는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2,4)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처음 받은 그 사랑을 버리고 사랑을 다르게 정의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를 이루는 신앙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여기에 머문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신 그 구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누구를 향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의 답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때문”(「신학대전」, Ⅱ-Ⅱ, q.23)이었던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 열매는 행복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몸에 관한 앎, 세가지

지금까지 우리는 창세기 2장 하느님의 인간 창조를 살폈으니, 오늘은 1장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 인간에 관한 앎을 더해보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ᅠ사람을ᅠ만들자.’”(창세 1,26) 하느님은 당신 계시에서 혼자가 아닌 관계를 드러내는 '우리'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해 사람이 당신들의 ‘모상’(imago)이며 또한 ‘유사함’(similitudo)이라고 명료하게 말했다. ‘모상’은 그 사람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인간 존엄성의 존재론적 뿌리가 당신에게 있음을, ‘유사함’은 인간이 완전하신 하느님과 다르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그래서 완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마태 5,48; 루카 6,36) 인간에 역동적 공간이 있음을 말한다.(로마 3,26: 8,30 참조) 완전함을 향해 인간이 나아가야 할 이 역동적 실현은 하느님 ‘모상’인 몸에 관한 이해와 속성 그리고 몸의 언어에 담겨있다. 이를 질문으로 표현하면, ‘나는 몸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몸은 어떤 속성을 지녔는가? 몸은 어떤 언어를 표현하는가?’이다. 첫째, 몸은 선물이다. 나는 선택과 자유 없이 남자/여자로 태어났고, 또 그 성(남성성/여성성) 그대로 거두어진다. 한 번은 세상 안으로, 또 한 번은 세상 밖으로의 불림이다. 그 부름을 살아가는 역사적 인간은 존재 자체가 선물이며 형이상학적 특징을 지니고 있고,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갖는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내 눈이나 세상의 눈보다, 나를 존재케 하신 분의 눈에 더 아름답고 더 가치가 있으며,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생의 목적이 있음을 안다. 둘째, 몸은 혼인적 속성을 지녔다. 혼인적 속성을 살 것이지 아닌지는 자신의 선택과 자유 안에 있다. 인간 몸이 육체성만 있지 않듯이 혼인적 속성 또한 결혼을 해서 나누는 성적인 육체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몸이 지닌 내적인 질서, 곧 자신을 내어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혼인한 이들은 부부 결합 방식으로 전부를 주고 전부를 받는 관계이지만, 동정이나 봉헌자들은 지향에 의해 생식성의 사용을 배제한 차원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실현한다. 이는 하느님이 성자를 통해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주셨듯이 인간 또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는’ 탁월한 삶의 형태이다. 만약 몸을 ‘선물’의 논리로 이해하고 행한다면, 내어줌은 자기 탈출, 자기 초월로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갈망의 놀라운 실현이다. 셋째, 몸은 사랑의 언어를 드러낸다. 눈짓, 손짓, 미소, 말 등으로 드러나는 이 언어는 자신의 감정을 타자에게 전달하는 인격의 표현 수단이다. 하느님이 말씀하신 “우리”(창세 1,26), 즉 세 위격은 가장 완전하게 자신의 전부를 주고 받아들인다. 다른 분을 위해, 다른 분과 함께, 다른 분 안에 현존하는 사랑의 관계이다. 결국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와 함께, 누구를 향해’ 살아갈 때, 처음부터 자신의 몸에 쓰여진 그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이때 인간에 대한 정의는 혼자가 아닌 관계에서 찾게 되고, 타자는 ‘나’를 보완하는 사람이 아닌 또 다른 나로 나의 책임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망을 역사 안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정점에 있다. 그분의 몸(성체)은 자신을 선물로, 자신의 신부와 하나 되기를 바라는 혼인적 속성으로, 사랑의 언어로 나에게 오는 것이다. 그분을 받아들임이 곧 내어줌이 되고, 이 관계가 세상 안에서 변화되면서 몸이 성사요 거룩함의 주체임을 드러내는 여정이 된다. 몸의 길이 곧 사랑의 길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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